vixx leo & n rps fanpage webzine

 

 

 

 

 

하늘이 지나치게 흐렸다. 아이고, 가벼운 앓는소리와 함께 꽃다발을 품에 안은 학연이 휠체어 바퀴를 돌렸다. 책상 위로 꽃다발을 내려놓고, 버겁게 아픈 허리를 펴다가 문득 고개를 숙인다. 아, 다시 허리 굽혀 발 아래로 향하는 손에는 어느샌가 수국 한 송이가 들려 있다. 방금 꽃다발을 내려놓을 때 저도 모르게 다리로 잘못 힘이 실린 모양이었다. 수국 한 송이를 꽃다발 옆에 가볍게 올려놓고는, 휠체어를 돌려 창문 쪽으로 향한다. 창문을 닫는 손길은 거침이 없었다. 아무래도 정말 비가 올 모양이었다.

 

꽃에 둘러싸인 삶은 생각보다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비가 오는 날이면 더욱 그랬다. 습기로 가득한 꽃집 안은 더욱 강한 향기가 차올랐다. 꽃들이 꼭, 자신도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머리가 아찔할 정도로 강렬한 외침이었다. 그렇게 외치지 않아도 난, 너희랑 떨어질 수 없는데. 문득 든 생각을 지워버리며 다시 휠체어 바퀴를 굴린다. 오늘따라 괜히 더 팔이 아팠다.

 

 

 

 

 

족저개화증.

 

학연이 앓고 있는 병명이었다. 그러나 학연은, 그보다는 다른 말로 불리는 데 더 익숙했다. Flower Dancer. 족저개화증 환자를 칭하는 별명이었다. 퍽 낭만적인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가끔 쓸데없을 만큼 낭만적이라는 생각도 했다. 아마도 이 이름을 처음 붙인 사람은 환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환자의 입장이라면 그렇게 예쁘기만 한 이름을 붙일 수 없었을 테니까. 자조의 의미가 아니고서야.

 

발걸음마다 꽃이 피어나는 병이었다.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그러했다. 퍽이나 동화같은 이야기였으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제대로 공론화된 적도 없는 병이었기에 같은 처지인 환자들만 알음알음 지내는 정도였다.커서야 대강은 그 이유를 알았고,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이야기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발병은 열세 살이었다. 그 날 뒤로 쭉 병을 감추며 살아왔다. 그 곳이 어디든, 제 발이 닿는 곳이면 꽃이 피어올랐다. 예쁘다, 그 생각을 했던 것도 잠시였다. 꽃이 피어나기 시작한 날부터 며칠간 학교에 가지 못했다. 오래 잘 수 있어 마냥 좋은 시간이 지나고, 친구들이 보고 싶다며 떼를 썼지만 통하지 않았다. 며칠간 부모님의 얼굴이 심각했다. 낮에 너무 자 밤잠을 채 이룰 수 없는 날이면, 엄마가 자꾸 자기 침대 옆에서 숨죽여 울다가 나가는 것을 보기도 했다. 곧 아파트에서 주택으로 이사를 했고, 곧 휠체어를 타게 되었으며, 곧 학교를 그만두었고, 곧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삶에서 단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발 밑에 짓이겨진 꽃잎들이 침대에 잔뜩 풀물을 들였다. 익숙치 않던 때에는 휠체어를 타고 다녔음에도 방에서 꽃향이 가시질 않았다. 제가 흘린 꽃들을 쓸어내던 엄마의 모습과, 집 밖으로 버려지던 철 다른 꽃잎들이 어린 마음에도 선명하게 박혔다.

 

 

 

지금까지도 다리는 멀쩡했으나 디디는 일이 손에 꼽혔다. 힘이 빠진 다리는 이제 잠깐 걷는 것도 버거워했다. 가끔 아무도 없는 곳에서 걷는 연습을 하다가 툭, 무릎이 꺾이는 횟수도 나날이 늘어갔다. 흐트러진 발걸음에 꽃잎들이 낭자했다. 발밑으로 흩뿌려진 꽃잎들을 내려다보다가 울컥, 눈물이 쏟아졌던 적도 있었다. 차라리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더 포기가 빨랐을까. 학연은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아예 걷지 못했다면. 그래서 이런 고민 따위 하지 않았다면. 아예, 그런 꿈도 꾸지 못하게. 그랬다면-.

 

 

 

그냥, 하는 생각이었다.

 

 

 

 

 

꽃집 종이 딸랑, 소리를 냈다. 

 

택운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손에 든 테이크아웃 커피 컵에서 얼음이 달그락, 소리를 냈다. 아이스 카페라떼와 카페모카. 일단 사 오긴 했는데, 커피는 처음이니까. 꽃집 문 앞에서 문 안쪽만 기웃이기를 몇 분. 꽃집 바깥에 있던 카네이션 꽃송이 수마저 다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앞에서 서성대고 나서야 겨우, 택운은 꽃집 문을 열 수 있었다.

 

 

 

"어서오세ㅇ... 아, ... 안녕하세요?"

"어, ... 네..."

 

어딘가 모르게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하필이면 꽃집이 텅 비어 있었다. 아니, 아니다. 수강생이라도 있었으면 분명 세 마디도 채우지 못하고 도망갔을 것이 뻔했다. 차라리 다행이다, 차라리 다행... 다행이다... 필사적으로 자기최면을 걸고, 택운은 말을 꺼냈다. 컵에서 흘러내린 물기가 도르륵, 손가락 위로 흘렀다.

 

 

 

"그, ... 어머니, 꽃..."

"아, ... 음..."

"... 좀, 드리려구요. 꽃다발 작게 부탁드릴게요."

 

그러나 결국 꺼낸 말은 글러먹었다는 축에 더 맞았다. 이 답도 없는 등신. 아니 물론 주문을 하러 온 건 맞지만, 커피를 양손에 들고 주문을 하는 병신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택운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겉으로 티는 많이 안 났을 거야. 자신의 포커페이스를 믿으며 다시 한 번 최면을 거는 택운이었다.

 

 

 

"... 아. 작약 괜찮으세요? 이게 꽃이 커서 몇 송이만 해도 예뻐 보여요."

"아, 네. 예쁜 걸로..."

 

그러나 학연도 죽을 맛인 건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장사했던 짬밥으로 대답을 하기는 했는데, 여전히 저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분명 표정은 딱히 변함이 없는데, 컵을 든 손이 덜덜 떨린다. 자기 딴에는 나름 노력하는 것 같아서 티낼 수도 없고. 포장지 두 겹에 가느다란 리본을 늘어지도록 묶는다. 수수하게 포장한 다발을 쥐고 휠체어를 채 돌리기도 전에 탁자 가까이로 성큼 그림자가 다가온다. 다리가 불편한 저를 배려하기라도 하는 건지, 처음부터 택운은 저를 움직이게 하는 일이 없었다.

 

채 꽃다발을 건네기 전에 탁자에서 달그락, 소리가 난다. 아직 리본의 매듭 쪽으로 향했던 시선이 소리가 난 쪽으로 이동한다. 익숙하게 내밀어지는 카드 대신, 들어올 때부터 줄곧 쥐어져 있던 컵이 탁자에 놓여 있었다.

 

 

 

"... 드세요."

"아... ..."

 

그리고, 짤막하게 이어지는 말.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학연은 잠시 택운의 얼굴만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 잘 마실게요. 겨우 뱉어낸 말에도 분위기는 풀리지 않았다. 날이 제법 더웠고, 택운의 컵에 담긴 얼음은 이미 반쯤 녹아내리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단단하게 굳어진 분위기에 잠시 팔이 굳었다. 그걸 알기라도 하는 듯, 택운이 학연의 손에서 꽃다발을 조심스레 가져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학연이 카드를 받아들었다. 삑. 카드기 소리에 이어, 무어라 말을 하는 학연의 시선은 여전히 택운을 향해 있지 못했다.

 

 

 

"여기요. 날이 제법 더우니까 오래 두고 보려면 관리를 좀 하셔야 할 거에요."

"감사합니다. ... 저, 학연 씨."

"물은... 네?"

"... 오늘도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어... ..."

 

 

 

그럼 이만 가겠습니다. 뒷말은 거의 입 안으로 삼키듯 중얼거리며, 택운은 도망치듯 꽃집을 나섰다. 그제야 고개를 든 학연이 멍하니 택운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귀가, 얼핏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새빨갰다. 가만 택운을 보던 학연이 한숨을 내쉬며 탁자 위에 들린 커피를 내려다보았다. 휘핑크림이 반쯤 녹은 카페모카를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학연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컵을 입가로 가져갔다. 초콜릿 시럽의 달콤함, 그리고 이내 느껴지는 씁쓸한 맛. 조금 미간을 찌푸렸다가, 학연은 다시 컵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가볍게, 얼굴을 쓸어내리는 손이 차가웠다.

 

 

 

왜 마시지도 못하는 커피를 받았는지,

저 자신조차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처음부터 둘이 이렇게까지 어색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사실 꽃집 주인과 그 꽃집에 오는 손님 사이에 어색해질 일이 있으면 얼마나 있으려고. 학연 역시 그랬다. 오히려 택운을 반가워하던 날도 분명, 있었다. 다리 때문에 거의 하루 종일을 꽃집에 박혀 있어야 했고, 꽃집의 노동 강도는 생각보다 셌다. 종종 팔이 움직이질 않아 집에 돌아가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있다가 잠들어 버리기도 했다. 가끔 제 일상이 너무 심심하다는 생각을 했다. 꽃다발을 받아들고 나가는 손님의 뒷모습, 꽃꽂이 수업을 듣고 나가는 수강생의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우울감에 빠져들 때도 있었다. 괜히 마음이 시려 나가고 싶다는 푸념도 하지 못했다.

 

그나마 천성이 낙천적이라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 우울증에 걸렸을 것이었다. 이왕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아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걸 위해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독립을 하였고, 꽃집을 열게 된 것이었으니까. 흔치 않은 남자 주인, 그것도 싹싹하기 그지없는 학연의 꽃집에는 제법 단골이 많았다. 가끔 다리도 불편한데 어떻게 꽃집을 하느냐고 노골적인 호기심을 드러내는 사람들이나, 더 나아가 욕을 하는 사람도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아직은 적당히 웃어넘길 수 있었다.

 

그러니 택운 같은 손님은 학연에게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처음 방문한 날을 시작으로 택운은 제법 자주 꽃집에 들러 주는 손님이었다. 꽃은 생필품이 아니었으므로 그만큼이나 자주 들리는 사람은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저와 비슷한 또래에, 큰 키며 날카로운 생김새와 다르게 영 숫기 없는 말투며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아주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았다. 손님, 이라는 호칭이 택운 씨, 로 바뀌는 것은 금방이었다. 고마운 마음에 작은 선인장 화분이라도 하나 얹어 선물이라도 하면, 다음번에는 회사에서 받았다며 가벼운 간식거리들을 두고 가기도 했다. 봉지를 건네는 것이 뭐 그리 부끄러운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귀가 새빨갰다. 저러다 터지겠다 싶어 놀리고 싶은 마음을 꾹 참은 것도 여러 번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친구를 만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조금 설레기도 했다. 아무튼, 학연의 삶에서 오래도록 사람을 알고 지낼 수 있다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었으므로.

 

 

 

그러나 마냥 해맑았던 학연과는 다르게 택운은 처음 본 그 순간부터 학연을 어려워했다.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학연이 너무나 택운의 취향이었다는 데 있었다. 제가 양성애자라는 자각은 분명 있었으나 어쨌든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취향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던 택운은 학연을 만나자마자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상형이라서 반하는 게 아니라, 반해서 이상형이 된다는 것을 학연 때문에 처음 알았다. 어디가 좋냐, 물어도 말할 수가 없었다. 첫눈에 반했으니까 결국 얼굴 보고 좋아하는 거 아니냐고 하면 할 말은 없는데, 생긴 것 때문에 좋아하는 게 아니냐고 하면 단호하게 부정할 수 있었다. 애초에 학연은 자신이 호감을 느꼈던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르게 생겼으므로. 그냥, 어디가 좋은 게 아니라 그라서 좋았다. 제가 말하면서도 이상한 문장이었지만 분명 그랬다. 다른 이들보다 한 톤 낮은 피부, 꽃을 다루던 뭉뚝한 손끝, 대답이 없어도 끊임없이 무언가 조잘거리던 목소리, 그리고 눈가에 주름이 푹 패일 만큼 밝게 웃던 모습까지 다.

 

 

 

그래,

아무것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 순간에는 그냥,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밖에 들지 않았으므로.

 

 

 

한참을 우물쭈물하다가, 꽃을 받아든 후에야 겨우 택운은 명함이라도 얻을 수 없냐는 질문을 할 수 있었다. 꽃이 너무 마음에 들어 그런다고, 개미소리나마 말도 걸 수 있었다. 여전히 생글생글 웃던 학연은 아, 경쾌한 소리를 내고는 명함 한 장을 건네주었다. 개인사업자라 특별할 것도 없다고. 과연 학연의 명함은 꽤나 심플했다. 차학연. 꽃집 이름 바로 아래에, 아무 수식어 없이 쓰인 이름을 한참이나 보던 택운은 그제야 제가 학연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와중에.

 

차학연.

 

그 이름을 선명하게 머릿속으로 새기는 제가 더, 어이가 없었다.

 

 

 

 

 

그 뒤로 택운은 끈질기게 꽃집을 드나들었다. 학연의 명함을 받았을 때, 손을 덜덜 떨면서도 명함을 건네 둔 탓인지. 두 번인가 세 번인가의 방문 만에 학연은 택운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 정택운 씨. 또 오셨네요! 경쾌한 인사에 택운은 붉어지는 귀를 숨기려 인사하는 척 고개를 숙여야 했다.

 

너 여자친구 생겼니?

정 주임님, 여자친구 생기셨어요?

 

하루가 멀다하고 꽃을 사 오는 탓에 집이며 회사에 차곡차곡 식물을 채우는 택운에게 역시 하루가 멀다하고 던져지는 말들이었다. 아니 그건 아니구요. 차마 꽃집 총각이 맘에 들어 그런다는 말은 할 수 없었으므로, 택운은 부정만 내어놓을 뿐 얌전히 입을 닫았다. 그러다가 문득, 학연도 그런 오해를 할까 봐 우울해진 적도 있었다. 진짜 내가 여자친구 있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 오늘은 가면 안 되나. 보고 싶은ㄷ, ... 아. 정말. 학연의 생각만 하면 귀를 감싸쥐는 게 습관이 되었다.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제 얼굴에서 홧홧하게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으므로.

 

 

 

택운의 부단한 노력은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둘은 아주 조금씩이나마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이 과연, 택운이 원하던 방향으로 작용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택운은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다. 몇 번의 방문이 쌓이고, 수번의 인사가 쌓인 어느 날, 무심코 회사에서 간식으로 나눠주었던 바나나우유가 지갑을 꺼내다 손에 잡혔다. 잠깐을 망설이다, 택운은 느릿하게 우유를 학연의 쪽으로 내밀었다. 저는, 많아서요. 멋없는 택운의 말에도 학연은 지나치게 환한 웃음을 보였다. 저 바나나우유 지인짜 좋아해요! 웃는 모습이며 묘한 악센트, 선뜻 내미는 손까지 전부 사랑스러워서, 택운은 다시 한 번 학연에게 반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결국 도망치듯 꽃집을 나와야만 했다.

 

 

 

학연 역시 택운이 제게 신경을 많이 써 준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자주 오는 손님이라 그렇겠지, 그런 태평한 생각이나 하고 있을 뿐이었다. 택운이 얼마나 삽질을 하고 있는지, 저 때문에 얼마나 속을 끓이는지 학연은 정말 하나도 알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학연은 맘 편히 택운에게 커피를 권하기도 했다. 마침 좋은 더치커피가 들어왔고, 택운은 커피를 좋아하는 것 같았고, 학연은 그런 택운과 친해지고 싶었으니까. 어쩐지 저와 마주앉은 택운의 손끝이 가볍게 떨리는 듯도 했으나, 택운의 표정은 여전히 약간은 뚱한 듯, 평온한 표정이었으므로 학연은 제 착각이겠거니 하고 넘길 뿐이었다.

 

 

 

 

 

택운이 미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분명 가까워지는데, 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학연이 저한테 반해 달라는 희망을 가졌던 것도 아니었다. 장애물이 많았으니까. 우연히 만난 사이에 남자 대 남자, 그리고 학연의 다리까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어쨌든 학연이 너무 좋다고. 너무 좋아서 다른 건 아무것도 신경쓰이지 않는다고.

 

그냥 연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만이라도 갖고 싶은데,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거절당하는 게 좋을 텐데, 이젠 그게 아닌 거다. 가까웠지만 그 이상을 바랄 수 없었고, 그만두기엔 자꾸 차학연이 눈에 밟혔다. 지금 볼 수 있는 차학연이 너무 예뻐서, 그래서 자꾸 허튼 생각이 들었다. 비생산적인 고민은 그만두고 싶었다. 고백하고 싶었으나, 점점 더 거절당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로운 생각이었다. 애초에 이루어질 가능성보다,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택운은 기본적으로 이성적인 사람이었으나 참을성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고민해본 적도 없었다. 딱 하나만 볼 수 있었고 지극히 단순한 사람이었으므로. 감정표현이 크지 못해 그렇지 솔직하지 못한 것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결국, 터져버린 것이다.

참지 못한 마음이, 펑.

 

 

 

 

 

***

 

쾅쾅쾅, 멀리 들려오는 소리에 학연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리상 제 집과 바로 붙어 있는 꽃집에서 들리는 소리 같았다. ... ... 근데 이게 무슨 소리지? 제대로 안 돌아가는 머리로 휴대폰을 확인한다. 11월 11일, 오전 3시 21분. ... 3시? 대체 이 새벽에 무슨 난리야. 도둑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올 리도 없고.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휠체어에 기댄다. 엉키는 걸음 아래로 빨간 꽃잎이 툭, 떨어졌다. 

 

대충 가디건을 걸치고 휠체어에 앉았다. 아, 어지러워. 복잡한 머리는 제대로 된 생각을 내어놓지 못했다. 문을 열고, 꽃집으로 연결된 복도를 통해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쾅쾅쾅, 그 짧은 시간에도 계속해서 울리는 소리에 등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을 꾹 쥔다. 여차하면 신고할 생각으로 블라인드가 내려진 문가에 다가가려는 찰나였다.

 

 

 

학연아...

 

 

 

꺼질 듯 작은 목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어떻게 들렸는지 모를 만큼 작은 소리가 용케도 문을 넘어 학연의 귀까지 닿았다. 순간 손이 뚝 멈췄다. ... 어, 이 목소리.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학연아, 학연 씨. ... 차학연. 연신 불리는 제 이름과, 중간중간 쿵쿵거리며 문을 두드리는 소리. 학연은 떨리는 손으로, 내려진 블라인드를 벌려 살짝 바깥을 내다보았다. 

 

퍽 익숙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목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내심 짐작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믿을 수 없어 부정했을 뿐이다. 파드득 뒤로 물러난 학연이 입을 막았다. 설마, ... 아니 그보다, 왜? 놀란 와중에도 문 두드리는 소리는 여전했다. 손도 아프지 않은지, 거의 십여 분을 넘겨 계속되는 소리에 한참을 망설이던 학연이 결국 블라인드를 걷었다. 

 

 

 

평소에도 반쯤 숙이고 있는 고개가 거의 푹 꺾여 있었다. 문에 머리를 쳐박듯 기댄 채, 연신 문을 두드리던 손이 빨갛게 얼어 있었다. 블라인드가 열리는 것도 느끼지 못한 듯,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다시 한 번 입을 연다.

 

 

 

학연아.

나와봐, 좀.

... ... 보고 싶어.

 

 

 

가만 문가에 귀를 대고 있던 학연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오른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하는 마음이 점점 커졌다. 애초에 고려해본 적도 없는 감정이었다. 상대 때문이 아니라, 저 자신 때문에.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학연이 결국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모르는 척 하기에는 날이 너무 추웠고, 들리는 목소리가 너무 간절했으며, 무엇보다 제가 가만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체인을 풀고, 잠금을 해제하고, 버튼을 누르고, 아주 천천히 문을 당긴다.

문이 열렸고,

네가 들어왔다.

 

 

 

 

 

택운의 몸이 그대로 학연에게 쓰러졌다. 어어, 할 새도 없이 휠체어가 뒤로 밀리려는 것을 겨우 버틴 학연이 택운을 받쳐들었다. 차가운 몸이었다. 온기보다 먼저 그득한 술냄새가 밀려들었다. 인상을 찌푸린 학연이 가볍게 택운의 어깨를 흔들었다. 정택운 씨. 단 한 마디였음에도 불구하고 택운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눈이 밤인데도 불구하고 선명하도록 까맸다. 한참 자신의 얼굴을 보던 택운의 눈이 금세 젖어들었다. ... 젖어들었다고?

 

 

 

학연, 씨.

 

 

 

금세 눈물을 뚝 떨어뜨리는 택운의 얼굴에 학연은 놀람을 넘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저, 저기. 택운 씨. 정택운 씨?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택운은 학연의 이름만을 부르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뿐이었다. 중얼거리는 말들이 울음에 섞여 뭉개졌다. ...해요. 내, ... ... 아해. ... 연 씨. 학연, ... ... 연신 중얼거리는 조각난 말들에 자신의 이름이 섞였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학연이 고개를 숙여 택운의 입가에 귀를 가까이 댔다. 고개를 숙인 탓에 발밑에 힘이 실렸다. 엉킨 다리 밑으로 연분홍빛의 꽃송이가 툭, 굴러떨어졌다. 한 송이, 그리고 두 송이. 발끝에서 짓이겨진 꽃잎이 짙은 분홍빛으로 변해 떨어졌다.

 

 

 

좋아해요.

 

첫눈에 반했어요. 내가 얼마나 애타는 줄 모르죠. 너무 좋아서, 좋아해서. 그래서 얼마나 노력하는 줄 모르죠. 근데 학연 씨는 그걸, 모르고. ... 좋아해요. 진짜 좋아해. ... 학연아, 내가 말야. ...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아요. 진짜 아무것도 상관 없어요. 학연 씨면 다 좋아요. 내가요, 내가. ... 학연, 학연 씨를요. 너무 좋아해서요. ... 그런데. 학연 씨는.

 

왜 몰라요. 내가 당신을, 이렇게 좋아하는데.

 

 

 

- 이상이, 택운과 학연이 지극히 어색한 관계가 된 이유였다.

 

 

 

 

 

***

 

눈을 떴을 때, 택운은 꽃집 카운터 쪽의 소파에 엉성하게 누워 있는 채였다. 깨질 듯한 머리와, 꽃잎 몇 장이 떨어진 꽃집 안의 풍경과, 제 몸에 덮인 담요를 차례로 바라보던 도중에 필름이 되감겼다. 돌아오는 기억을 읽어내던 택운의 얼굴이 싸하게 식었다. 그대로 푹, 고개를 떨어뜨린 택운이 자신의 머리를 사정없이 쥐어뜯었다.간밤의 파워풀한 취중고백이 잊히지도 않고 머릿속에 찰칵찰칵 상영되고 있었다. 그놈의 술이 웬수다. 이 흔한 문장을 자신이 쓰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하물며 이런 상황에서는. 

 

발단은 어제가 택운의 생일이었다는 데 있었다. 생일이면서 어딜 내뺄 생각을 하냐고, 상혁(대학생 시절 '폭탄주 소믈리에'로 불렸던 전적이 있다)은 거하게도 생일주를 말아 주었다. 역시 그 생일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것도 생일이 불금이라는 쓰잘데기없는 이유 때문에 택운은 꼼짝없이 그 독한 생일주를 받아 마실 수밖에 없었다. 한 잔도 아닌 여섯 잔을. 결국엔 수많은 회식으로 단련된 택운의 간도 K.O.를 외쳤더란다. 분명 술자리가 끝나고 비틀거리다가 택시에 밀어넣어진 것 같은데, 도대체 제가 왜 꽃집까지 와서 진상을 부렸는지 이유는커녕 전후상황조차 알 수가 없다. 내가 무슨 김유신도 아니고. 말 목을 자를 수는 없으니 택시 탔던 신용카드를 잘라야 하나. 

 

온갖 잡생각에 하얗게 질린 얼굴과는 반대로, 귀와 목은 새빨갛게 물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딴 건 필름도 안 끊기고!!! 아아악,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다가 택운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 그래서 학연 씨는 어디 있지. 

 

 

 

충분히 꽃집을 열 준비를 할 만한 시간이었다. 늘 새벽같이 시장에 나간다는 말을 나눈 기억이, 겨우 어제의 기억을 비집고 떠올랐다. 학연이 깼다는 생각을 하자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도망을 쳐야 하나, 아니면 빌어야 하나, 아니면 제가 싸질러 놓은 말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하나. 고백 중 최악이라는 취중고백이라는 폭탄을 던져 놓은 어제의 자신을 미친듯이 원망하며, 택운은 필사적으로 수습할 방법을 찾아내는 중이었다.

 

 

 

 

 

한편 학연은 한참 혼란에 빠져 있던 중이었다. 너무 정신을 빼놓고 있어서 평소와 똑같이 오픈 준비를 하면서도 시간이 두 배는 더 걸리고 있었다. 생각이 많이 자꾸만 손이 느려지는 것 때문이기도 했고, 일을 끝내고 꽃집으로 들어가면 택운을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쯤 일어났겠지. 어제 일을, 기억은 하려나. 

 

인생 처음으로 받은 고백은 아니었다. 학연은 꽤나 싹싹한 성격이었고, 사회생활이 적다고 해서 사람을 아예 못 만나고 사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이렇게 사고 같은 고백은 처음이었다. 무례하다면 무례할 수 있을 만큼 갑작스러웠고,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쿵, 제 삶에 부딪혀 온 고백이었다. 그 상대가 택운이라는 점이 가장 괘씸했다. 덮어놓고 욕할 수가 없어서. 어쨌든 학연은 택운을 오랫동안 맘에 들어했으니까 말이다. 사람으로서.

 

 

 

 

 

"... ..."

"... ..."

 

하지만 언제까지나 피할 수는 없었다. 백 번 양보해서 가게 문이야 오늘 닫을 수 있다고 해도, 어쨌든 꽃집에 있는 정택운은 치워야 했다. 차라리 택운이 그냥 내뺐으면 좋으련만, 예의가 지나치게 바른 택운은 부동자세로 소파에 앉아 학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까치집을 지은 머리가 쥐어 흔들기라도 한 것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거의 까마귀집이 된 머리를 보며 학연은 웃음이 나오는 것을 꾹 참았다. 그리고 동시에 깨닫기도 했다. 아, 필름 안 끊겼구나. 다 기억하고 있구나. 저렇게 머리를 죄 쥐어뜯어 놓은 걸 보면.

 

한참 동안 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 ... 그 고백, 없던 걸로 해 줄까요?"

 

그리고 그 정적을 깬 건 학연이었다.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던 택운의 얼굴이 휙, 학연을 향했다. 매서운 눈초리에 학연이 순간 움찔했다. 난 정택운 씨 생각해서 말해 준 건데. 혹시 후회하고 있을까 봐. 나름의 배려가 쓸모없는 취급을 받은 것 같아 학연은 조금 심란해졌다. 대체 어쩌라고, 그래서.

 

 

 

"아니요."

"혹시 내가 잘못했으면, ... 네?"

"그거 없던 걸로 안 해도 돼요. 저 학연씨 좋아하는 거 맞아요."

 

세상에. 방금 전까지 내 눈도 못 마주쳤던 정택운은 어디에 갔나요. 학연은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평소보다 조금 더 날이 선 표정으로 자신을 보던 정택운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잔뜩 구겨진 자켓과 코트, 가방을 챙겨드는 택운을 학연은 그저 황망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간다고? 지금 이 상황에서, 아무 설명도 안 하고 간다고? 왜???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밤에 실례가 많았어요."

"... ... 저기요, 택운 씨."

"하지만 없던 일로 할 생각은 없어요. 만약에 맘에 안 드시면, 그냥 거절하시면 돼요."

"하지만... ..."

"그런데 거절 안 하시면, ... 전 이제 학연 씨 좋아하는 티 낼 거에요."

"... 네?"

"좋아한다는 말도 할 거고. 보고 싶다는 말도 할 거고. ... 아무튼 그럴 거에요. 학연 씨가 제대로 대답해줄 때까지."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어이가 없어 입을 떡 벌린 학연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택운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붕붕 떠 있는 뒷머리 아래로 보이는 흰 뒷목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 감사는 나중에, 제대로 말할게요. 중얼거리는 투로 말한 택운은 빠른 걸음으로 가게를 나섰다. 딸랑, 문에 달린 종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학연은 멍하니 휠체어에 앉아, 한 발짝도 떼지 못한 채 택운이 나간 그 문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뒤로도 한참을.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하라고.

 

 

 

 

 

집으로 돌아온 택운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벽에 걸린 샌드백에 주먹을 날리는 일이었다. 아, 아, 아! 시원하게 내지르지 못한 소리가 입속으로 먹혀들었다. 퍽퍽 몇 번이고 주먹질을 하고 나서야 택운은 겨우 바닥에 주저앉을 수 있었다. 흑역사를 쌓다 못해 아주 적금을 드는구나. 무슨 인터넷소설 주인공이냐, 네가? 정택운 꽂히면 불도저가 따로 없다더니, 친구의 말을 몸소 확인하게 되었으나 택운은 별로 기쁘지만은 않았다. 더 억울한건, 시간을 돌린대도 어쨌든 그 말을 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지만.

 

 

 

 

 

***

 

아무튼 이러한 일련의 과정 때문에 택운과 학연은 어색한 사이가 되었고, 택운의 답없는 외사랑이 시작된 것이었다. 사실 택운은 이 상황이 그렇게 좌절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거절당하는 것보다 학연을 못 보게 된다는 것이 더 싫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외려 완벽히 거절당한 것보다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학연이 명백히 자신의 마음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도 나쁜 것만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전히 학연은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제게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고, 진전 없는 관계는 제게도 지치는 일이었으며, 무엇보다도 학연을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꾸만 갈증이 일었다. 걱정이 날로 늘어갔다. 이대로 가다가 또 무슨 사고를 칠까 봐.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린, 좋아하는 마음을 감당할 수 없어질까 봐. 그리고 그 땐, 학연이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을 것 같아서. 

 

사실 기다리려면 더 기다릴 수도 있었다. 오히려 끝을 먼저 고하는 것이, 이전에 했던 말과 어긋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별로 상상하고 싶지는 않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 학연을 안 보게 된대도 끝이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최악인 것은 싫었다. 

 

 

 

답 없는 고백을 한 지도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결정을 할 시간이었다.

 

 

 

 

 

반쯤 불이 꺼진 꽃집의 적막을 종소리가 갈랐다. 아, 죄송하지만... ... 리본을 감던 학연이 들어오는 인영에 그대로 말을 멈췄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여전히 고개를 잔뜩 꺾어 올려다보아야 할 만큼 키가 크고, 그럼에도 고개를 푹 숙인 채, 얼굴보다 정수리를 더 많이 보여주는 사람. 꺾인 고개가 느릿하게 올라온다. 어딘가 모르게, 결연한 표정의 택운을 보던 학연이 고개를 슬 기울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꽃 사러 온 건 아닌 것 같고.

 

 

 

"... 또 술 마셨어요?"

"아니요."

 

그런 거 아니에요. 단호하게 따라붙는 대답에 학연은 반쯤 감긴 리본을 도로 봉에 걸었다. 저도 모르게 휠체어를 조금 더 안쪽으로 움직인 학연이 택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그럼, 무슨 일이세요?"

"... ...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 ... 무슨, 말이요?"

"이번에는 주정 아니에요. 진짜로."

 

차분한 목소리가 꽃집 안에 울렸다. 확실히, 진지하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학연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올렸던 시선을 도로 내린다. 빈 손 끝이 허전해서,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조심스레 맞잡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피가 제대로 통하지 않는 것처럼.

 

 

 

"... 할 말이 뭔데요?"

"나 많이 불편했죠."

"... 네?"

"불편하게 해서 미안해요. 무슨 말 해도 변명은 안 되겠지만."

"... ..."

"너무 좋아해서 그랬어요."

"... ... 정택운 씨."

"... ... 그러니까 이제 안 그럴 거에요. 차학연 씨가 싫으면."

 

나직하게 이어지던 말이 끊어진다. 잠시 멈췄나 싶던 말이 이어진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학연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 ... 뭐라구요? 되물은 목소리 끝이 가볍게 떨렸다. 손끝이 더욱 차게 식어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떨림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택운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학연은 문득 지나치게 태연해 보이는 택운이 원망스러웠다. 이유도 모르게.

 

 

 

"... ... 지금 나가면, 다시는 안 올 거에요. 나."

"... ..."

"그러니까 그게 싫으면,"

"... ..."

"... ... 지금 가지 말라고 해 줘요."

 

마지막이에요. 

 

 

 

택운의 말이 시렸다. 너무 시려서, 갑자기 머리 위로 찬물이 끼얹어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대로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마지막, 그 말의 울림이 너무 컸다. ... 근데, 왜? 왜 이런 기분을 느끼고 있지? 내가, 왜? 차가운 손을 도로 그러쥐며, 학연은 다시 시선을 내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학연을 바라보던 택운은 느리게 눈을 내리깔았다. 허무한 미소만이 피식, 터졌다.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학연씨, 정말 많이 좋아했어요. 나."

"... ..."

"... ... 사실 지금도 그래요. ... 잘 지내요."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딸랑,

몇 번이고 울렸을 꽃집 문의 종소리가 오늘따라 길게 울리는 듯했다.

 

 

 

택운이 나가고 난 뒤에도 학연은 한참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택운의 마지막 말에 고개를 들어, 고개 돌린 택운의 얼굴을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아니,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택운의 말이 귀가 아니라 목을 막아버린 느낌이었다. 내쉬던 숨이 갑자기 턱 막혔다. 그, ... ... 잠깐, 만요. 중얼거린 말은 한참을 늦어 있었다. 몇 걸음이나 늦었을지 모를 말이었다. 이미 택운이 나가버린 종소리마저도 흩어져 남아 있지 않은 시점이었다.

 

 

 

몰랐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감히 누군가 자신을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기에, 애초에 염두에 두고 있지 못한 문제였다. 의식적인 무시였다. 그건 택운의 고백 후에도 계속되는 감정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뻔히 들이밀어진 진실에도 학연은 두려움을 앞세우기 바빴다. 저 사람이 뭐가 아까워서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하겠느냐고. 여자한테도, 아니 남자한테도 충분히 인기 많을 사람이 왜 나 같은 사람한테 관심이 있겠느냐고. 별 볼일 없고, 자영업자고, 사회생활도 제대로 해본 적 없는데다가 밖을 제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는 장애인인데, 나를 좋아할 이유가 없다고.

 

나를 진심으로 좋아할 리가 없다고.

 

 

 

... 그런데,

그래서 네 마음은?

 

 

 

순간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지금껏 한 번도 의식해 보지 않았던 진심을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평생에 처음일지도 모르는, 그런 진심. 끝없는 자괴감에 가려져 한 번도 들여다본 적이 없던 속마음. 아주 처음, 간절히 원하던 것을 포기했을 때, 멈추지 않던 눈물을 마음에 가두는 대신 함께 가라앉혔던 바람들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슴 속에 철썩, 파도가 쳤다. 시린 마음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이전엔 들리지 않던 진심이었다.

 

 

 

처음 꽃을 사갈 때, 택운은 뜬금없이 자신의 명함을 두고 갔다. 여기 것만 가져가면 되지 않나, 생각하면서도 이게 회사원의 버릇인가, 하며 웃은 적이 있다. 택운이 제법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름을 더 빨리 외웠는지도 모르고.

 

우물쭈물, 바나나우유를 내밀던 손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모른 척 더 환하게 웃었더니, 그날따라 나가던 택운의 걸음이 조금 빨랐다. 재미있다고 여기면서도 어쩐지, 아쉬웠던 것 같은데.

 

처음에는 정말 수강생이 좋은 커피를 두고 갔었다. 하지만 그 커피를 다시 구매한 건, 아마도 제 입맛에 맞았다는 이유 하나만은 아니었을 텐데.

 

언젠가 택운이 꽤 오래도록 오지 않은 적이 있었다. 꽃은 생필품이 아니니까, 분명 이해를 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 근데 왜 그렇게, 아쉬웠을까. 왜 자꾸 택운을 기다리게 되었을까. 왜 택운이 오랜만에 다시 꽃집을 들렀을 때, 그렇게 기뻤을까.

 

정택운이 술 마시고 고백했던 날. 그 고백이 유쾌하지 못했던 건, 결코 그 내용 때문은 아니었지 않아?

 

정말, 택운의 고백이 아무것도 아니길 바랐나?

 

그 뒤로 택운이 보고 싶다고 했을 때, 정말 설레지 않았어?

 

 

 

정택운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면,

네가 정말 괜찮을 것 같아?

 

 

 

왜, 정택운이 좋아한다는 말에.

대답 못 했어?

 

 

 

...

 

 

 

뭘 망설이고 있어.

사실 너도, 좋아하잖아.

 

정택운.

 

 

 

 

 

***

 

황급히 휠체어 버튼을 눌렀다. 브레이크가 풀린 휠체어가 덜컥 움직이다가 그대로 멈췄다. 작업을 한답시고 조금 깊이 휠체어를 들여놓은 탓에 책상 틈으로 바퀴가 걸려 있었다. 덜 감은 리본 끝이 바퀴에 잔뜩 엉켜 있었다. 마음은 급한데 자꾸만 손이 헛나갔다. 방향키를 잘못 누른 탓에 오히려 바퀴가 더 끼어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깨문 입술이 아플 지경이었다. 아, 진짜! 쾅, 주먹으로 휠체어 버튼을 내리친 학연이 결국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주 얇은 꽃잎들이, 

마음에서부터 발 밑으로 내려앉았다.

 

갑자기 일어선 몸에 옅게 현기증이 일었다. 황급히 책상을 짚은 학연이 잠시 숨을 고르다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거의 부딪히듯이 유리문을 밀어젖히고, 그 바람에 조금 걸음이 휘청거렸다. 약해진 발목이 그대로 꺾이려는 것을 억지로 버텼다. 어디로 가야 하지. 왼쪽? 오른쪽? 택운 씨가 보통, 나갈 때. 유리문 너머로 보이던 뒷모습은, 그러니까. 

 

 

 

... 뒷모습.

 

 

 

택운이 무언가, 화분을 사 갔을 때였다. 아마도 선인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화분 배열을 다시 가지런히 맞추어 놓고 고개를 들었을 때, 유리문 너머로 한참 꽃집을 보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 도망치듯 멀어졌던 택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모습이 문득, 오늘 문을 나서던 택운의 뒷모습과 겹쳐진다. 까만 머리칼. 들고 있던 서류가방. 언제나 한 손에 꽃을 쥐고, 꽃집을 돌아보던 모습.

 

 

 

택운은 언제나,

꽃집을 아주 멀리 두고서야 겨우 뒤를 돌았다.

 

 

 

비틀거리던 걸음이 겨우 다시 잡혔다. 얇게 겹쳐진 꽃잎들이 발 밑에서 짓이겨지다가, 옮기는 걸음에 겹쳐지듯 꽃을 피웠다. 까만 땅 위에서 꽃잎들이 희게 흩뿌려졌다. 거의 본능적으로, 택운이 향하던 곳을 향해, 서툴게나마 달리기 시작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택운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일부러 천천히 걷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조금 서글퍼지는 것도 같았다. 그래도, 결심은 길었지만 결심한 대로도 했고. 학연을 만난 날 중 (적어도 제정신일 때만 센다면) 가장 말을 잘 했던 날인 것 같기도 한데. 미련은, 또 아쉬움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이나 하게 되는 밤이었다. 괜히 맘이 시려 택운은 빈 손만 주머니 속에서 꾹, 쥐었다 놓을 뿐이었다. 쿨하게 말 뱉어 놓고 실은 쿨하지 않을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그걸 실감하는 것이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원래 더 좋아하는 쪽이 지는 거긴 한데. 고작 몇 개월의 짝사랑이 이렇게 파란만장할 수가 있을까. 택운은 눈물 대신 피식, 실소를 내뱉었다. 진짜 멍청하다, 정택운.

 

 

 

택운씨!

 

 

 

이제는 환청까지 들린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어지간히도 좋아한 모양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자 뒷목으로 서늘한 바람이 느껴졌다. 정말 겨울이긴 한 모양이네. 아니면 마음이 시려서 그런가. 괜히 감상적인 생각을 하며 여전히 느릿한 걸음을 옮길 때였다.

 

 

 

정택운!!!

 

 

 

귓가로 뛰어들어온 이름이 선명했다. ... 설마. 갑자기 쿵 내려앉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켰다. 너무 기대하지 말자. 너무 기대하지, ... 말자. 되뇌이고는 느릿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것보다, 팔에 닿아오는 손이 더 빨랐다. 

 

 

 

잔뜩 흐트러진 머리를 한 학연이, 자신의 팔을 잡고 있었다. 

 

 

 

 

 

어쩌면 전혀 생각지도 않던 광경에 놀라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학연이 휠체어 없이 서 있던 것도, 이 추운 날 이마가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던 것도, 그리고 절 따라왔다는 것도. 하나도 놀랍지 않은 것이 없어서. 그러나 택운의 판단은 성급한 판단이었다. 아직 더 놀라운 일이 남아 있었기에.

 

 

 

... 가지, 흑. 마요.

 

 

 

 짧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학연의 눈에서 눈물이 투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택운이 무어라 할 새도 없이, 학연은 울음을 터뜨렸다. 우윽, 으으윽. 제대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린 학연 때문에 택운은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대로 미끄러지듯 바닥으로 쓰러진 학연이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택운의 팔을 잡은 손은 풀리지 않은 채였다. 놀란 택운이 엉겁결에 함께 무릎을 꿇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택운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학연의 눈물을 닦아줄 뿐이었다. 울지 마요, 왜 울어요. 그런 말 한 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학연의 얼굴만 겨우 닦아주던 택운이 이상한 위화감에 조금 더 고개를 들었다. 학연의 등 뒤로 시선을 돌린 택운이 눈을 크게 떴다. 깜빡, 깜빡. 몇 번이나 눈을 깜빡여도, 제가 보고 있는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하얀 꽃송이가 길에 흩어져 있었다. 아니, 흩어져 있다기보다는 줄지어 놓였다는 말이 더 옳았을 것이다. 절대 실수로 흘린 양이 아니었다. 헨젤이 떨어뜨린 조약돌도 그보다는 많을 듯 싶었다. 아스팔트에 흩뿌려진 꽃잎들이 하얗게 빛을 냈다. 어디서 시작되었을지 모르는 꽃잎의 행렬은 바로 제 앞에서 끝나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학연의 아래에서 끝나 있었다. 

 

지나치게 이질적이었다. 검은 아스팔트 위에 뿌려진 하얗고 가느다란 꽃잎과 꽃송이들, 그리고 그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리없이 울고 있는 차학연. 가지 말라고, 자신을 잡는 차학연. 이상하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은 풍경이었고, 그렇기에 이상한 생각을 할 수 있었다. 학연이 이 꽃들을 흘린 것이 아니라, 이 꽃들이 학연을 따라온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을.

 

 

 

 

 

잠시 홀린 듯 꽃들을 바라보고 있던 택운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학연을 일으켰다. ... 그만 울어요. 겨우 그런 말도 건넬 수 있었다. 휠체어 없이 달려나오기는 했으나 어쨌든 지금껏 다리가 약한 모습을 보아왔으므로, 택운은 조심스레 학연을 제게 기대게 했다. 여전히 힘이 없는지 비틀거리며 다리가 꺾이는 학연을 황급하게 부축한 택운이 학연의 다리를 살폈다. 괜찮아요, 물으려던 찰나에 택운은 다시 한 곳에 시선을 두었다. 학연의 발이 닿았던 곳에서, 하얀 꽃송이가 몽글몽글 피어나기 시작했다. 꽃봉오리가 톡 터지며 노란 꽃술이 드러났다. 하얗고 가느다란 꽃잎이 빨리감기라도 누른 것처럼 벌어졌다. 바닥에 놓여 있는 꽃과, 꼭 같은 모양의 꽃이었다.

 

가만 바닥으로 향해 있던 택운의 시선을 느꼈는지, 학연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 ... 같이, 가줄 수 있어요? 나직하게 뱉어지는 말에 택운이 고개를 들었다. 학연의 발간 눈가와 꾹 다문 입술을 보다가, 택운은 학연을 번쩍 안아들었다. 아, 잠깐만...! 놀란 학연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학연을 업은 택운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흘끗 학연이 서 있던 자리에서 다시 벌어지는 꽃봉오리에 시선을 두었다가, 택운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불편한 듯 꼼지락거리던 학연이 결국 택운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꽃집으로 향하는 택운의 발걸음이, 조금 더 느려진 듯도 했다. 택운의 옆에서 살랑거리던 꽃잎이 밤바람에 조금씩 흩날리고 있었다.

 

 

 

 

 

***

 

다시 돌아온 학연의 꽃집 안은 여전히 훈훈한 온기가 돌고 있었다. 이런저런 향이 뒤섞인 오묘한 꽃 향기도, 또 반쯤 불이 꺼져 여느 때보다 고요한 공기도, 돌아오자마자 다시 휠체어에 앉은 학연의 모습까지 아까 전 방문했을 때의 그대로였으나 새삼 많은 것이 뒤바뀌어 있었다. 바닥에 어지러이 흩뿌려져 길까지 이어진 새하얀 마거리트 꽃잎과, 그것을 쓸어내는 학연의 손길과, 약간 붉게 부은 학연의 얼굴 같은 것들이.

 

청소는 한참이 걸렸다. 사실 그만한 양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으나, 학연에게 마음의 준비를 해 주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택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학연의 뒷모습만 흘끗흘끗 바라볼 뿐이었다. 혹시나 눈이 마주칠까봐 고개조차 제대로 돌리지 못한 채. 그러나 학연은 택운의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바닥으로만 시선을 쳐박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이 지나고, 삐딱하게 기울어진 화분까지 어느 정도 매만지고 난 뒤에야 학연은 겨우 택운을 마주할 수 있었다. 빗자루를 내려놓고, 다시 휠체어 바퀴를 잡은 학연의 손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 ... 병, 이에요."

 

 

 

힘겹게, 아주 힘겹게.

 

학연은 한 마디 한 마디씩, 말을 토해냈다. 토해냈다는 표현이 맞을 만큼 힘든 어조였다. 족저개화증, 걸음마다 꽃이 피어난다는 증상, 그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는 것, 원인도 결과도 모르는 병이라는 것, 세간에 알려지지 않아 치료할 수 있는 방법도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여기까지 말하고 한참 숨을 고르던 학연은, 다음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벌써 몇 년째 학교를 다닌 적이 없었고, 사람과 사귈 기회가 적었으며, 보이는 것보다 병으로 인해서 힘든 일이 많다는 것. 철 모르고 떨어지는 꽃잎들을 감추기 위해 꽃집을 시작했으며, 조금만 발이 닿아도 닿은 곳이면 모두 꽃이 피어난다는 점. 그리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택운의 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없었다는 것. 아니 한 번도 택운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제 마음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그리고. 

 

 

 

그럼에도 당신을 볼 수 없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이 무서웠다는 것까지.

 

 

 

힘든 고백이었다. 낭만적인 말 따위는 하나도 없었다. 그저, 고백일 뿐이었다. 자신에 대한 고백, 자신을 알아달라는 고백, 그리고 정말 하고 싶었던 말 하나뿐. 여전히 휠체어에 얹은 손은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결코 추위 때문은 아니었다. 두려움, 무서움, 혹은 불안감. 온갖 감정이 뒤섞였다. 두통이 일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차마 택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택운은.

 

"... 저, 학연 씨."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 그, 이미 잘 알겠지만. 내가 좀 말을 잘 못 해요. 그러니까 조금만 참고 들어줘요. 내 말, 다."

"... ..."

"학연 씨 병 보고... ... 놀랐죠. 놀랐어요. 처음 보는 거니까. ... 근데 저 사실, 학연 씨가 나 따라나온 것 때문에 더 놀랐어요. 그게 더 기뻐서, 뒤에 꽃 있는 거 안 보였어요. 정말로. ... ... 사실, 꽃도. 저 꽃에 그렇게 관심 없어요. 전에는 꽃 사본 적도 진짜 적어요. 근데 다 학연씨 때문에 사러 온 거에요. 이걸 내가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 음. ... 응, 그 땐 제대로 고백할 정신이 아니었어서. 다 못 말했어요. 미안해요, ... 어, 내가 서툴러서."

"... ..."

"병은, 말이에요. ... 맞아요. 중요한 거죠. 학연 씨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얼마나 감추고 싶었을지. 당연히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알 것 같아요. 그리고 나도 생각은 했어요. 학연 씨 다리 불편한 줄로만 알았으니까. 그래도 그게 신경쓰이지 않을 만큼 좋았으니까. ... 근데 나 지금도 그래요. 학연 씨. 나 정말 괜찮아요. 신경쓰이지 않는다는 건 아니에요. 그만큼 우리가 맞춰나가야 할 게 많다는 말이니까, ... 근데 나 그래도 괜찮아요. 학연 씨만 이해해 주면, 노력할 수 있어요."

"... ..."

"아, 너무 복잡하죠. 미안해요. 그러니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요. ... 학연 씨가 나 쫓아왔잖아요. 그렇게 감추고 싶은 병도 들킬 각오 하고, 그렇게 달려왔잖아요. 그래서, 내가 아주 많이."

 

 

 

기뻐요.

 

 

 

마지막 말은 속삭이듯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선명하게, 학연의 마음속으로 녹아들었다. 

 

 

 

 

 

학연의 손이 가볍게 떨려왔다. 살짝 얹어만 두었던 손을 택운이 느리게, 아주 천천히 고쳐잡았다. 학연의 손을 온전히 제 손으로 감싸쥔 택운이 시선을 잠깐 맞잡은 손에 두었다가, 다시 학연에게로 올렸다. 처음에는 날카롭다고만 생각했을 눈 끝이 어쩐지 유하게 풀려 있다는 생각을 하며, 학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자꾸 고개를 숙이고만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제 앞에 있는 남자가,

 

 

 

"그러니까 학연 씨."

"... ..."

"내가 학연 씨, 계속 좋아해도 되는 거죠."

"... ..."

"나 따라왔으니까, ... 허락해준 거죠."

 

 

 

저를 온통 붙들어 놓고 있어서. 

 

 

 

 

 

그렇다고 해요. 택운은 퍽 간절하게 들릴 그 말을 억지로 삼켰다. 제발, 그렇다고 해요. 들릴 리는 없었으나 들리기를 바랐다. 어떻게 좋아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조차 모르지만, 이유를 모르고서도 이렇게 좋아했으니 놓칠 수 없는 것은 확실했다. 지금 잡은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허락해준다면 함께 걷고 싶었다. 어느 곳을 걷더라도 학연은 꽃 위를 걷고 있을 테고,

 

저는 꽃들 사이에 서 있던 학연에게 첫눈에 반했으니까. 

 

 

 

학연은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택운을 잡았는지도 모르겠고,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는 있었으나 부정하고 싶었다. 택운은 제게 지나치게 큰 자극이었으며 변화였기에.

 

 

 

그러나 택운의 손은 너무도 따뜻했고,

그 손을 잡기 위해서 저는 너무도 먼 길을 돌아왔었고,

더 이상 학연은 이 손을 놓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학연은 다시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눈가를 꾹 눌렀다. 더 울고 싶지는 않았다. 쿵, 쿵. 울리는 심장 소리가 택운에게 들릴 것만 같다는 엉뚱한 생각에, 학연은 택운의 얼굴을 조심스레 쳐다보았다. 택운의 표정은 여전했다. 여전히 큰 변화가 없는 표정이었으나, 어쩐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동안 학연은 택운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몇 달 동안 봐 왔던 표정이 오늘따라 달라 보였다. 이상한 마음에 한참을 바라보다가 문득, 깨닫고 만 것이 있었다.

 

택운 역시, 저만큼이나 긴장하고 있었다.

 

얼핏 평온하게까지 보였던 그 표정이 사실은 긴장해서 변화가 없었다는 것을, 학연은 지금에야 알았다. 아무 말도 없이 한참 동안 자신을 쳐다보는 학연의 행동에 슬쩍 고개를 돌리던 택운의 목께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저를 잡지 않은 손이 굳게 주먹을 쥐고 있었다. 안 그래도 하얀 손마디가 창백해질 만큼 잔뜩 힘을 준 채였다. 순간, 어울리지 않게 웃음이 나왔다. 별안간 옅은 웃음을 띠는 학연의 모습에 택운은 주먹을 조금 더 쥐어냈다. 학연의 손을 잡고 있던 택운의 손에 조금씩 힘이 풀리려는 찰나였다.

 

 

 

학연의 손이 택운의 손을 다시 쥐어왔다. 숫제 깍지까지 껴 잡고는, 옅게 휘어진 학연의 눈이 택운을 향했다. 한참이나 잠잠했던 학연의 입술이 드디어 열렸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이제 당신을 기다리게 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테니까.

 

 

 

"좋아할 거면, ... ..."

"... ... 네."

"... ... 우리 같이 좋아해요. 이제."

 

 

 

그러니까, 나랑 함께 걸어줄래요. 그 말은 조금 더 기다렸다가 하기도 했다. 지금은 이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찼으므로. 대신 학연은 택운의 손만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그제야 택운은 푹, 고개를 숙였다. 아, 정말. ... ... 짧은 탄식 후에, 곧바로 고개를 든 택운이 학연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학연이 놀랄 틈도 없이, 학연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택운이 작게 중얼거렸다. 

 

 

 

... ... 고마워요. 

 

 

 

속삭이는 말이 귓가 바로 앞에서 울렸다. 결국 작게 웃어버린 학연이, 조심스레 비어 있는 손을 들어 택운의 등을 끌어안았다. 가벼이 등을 쓰다듬던 손이 잠시 머뭇이다, 이내 어깨에 기댄 택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온실에 들어앉은 기분이었다. 손도, 품도, 기댄 온기가 모두 다 너무도 따뜻하고, 마냥 조르고 싶을 만큼 기꺼워서.

 

 

 

 

 

누군가와 함께 걷는 것은 처음이었으나,

처음으로 만족하고 싶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누가 그를 하찮은 형이라 했는가. by. 익명
Salvatio by. D. 에르타
꽃잎놀이 by. 허브
사랑의 죽음 by. 춘몽
소년과 소년의 청춘 by. 청
Our Happy Ending by. 창문
힐링이 필요해 by. 징어
Nostalgia (노스텔지아) by. 이든
인어소년 by. 몽환의 오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by. 멜렛
One Step Closer to Blossom by. 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