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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Djjj6oIyrTU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W. Mellet

 

 

열흘 붉은 꽃은 없다. 학연은 제 방 한가운데 흉물스럽게 놓인 두꺼운 철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주 오래 전, 어느 인간이 제 명(命)을 담아 써 놓았던 문장. 학연이 낡은 조소를 삼켰다. 저주다. 그것도 참으로 조악한 저주였다. 이 공상 같은 원망을 나는 얼마나 되풀고 곱씹으며 시간을 흘려온 것인가. 덜컹, 순간 검은 활자가 번쩍이고 꽃 한 송이 간신히 드나들 틈만 있던 문이 사람이 오고 갈 만큼 크게 열렸다. 문틈을 비집고 흘러들어온 공기는 학연이 외롭게 거느린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따뜻했다. 학연은 구석에 산처럼 쌓인 말라버린 꽃무덤을 보며 중얼거렸다. 목단이 피는 계절일까? 자꾸만 흐려지는 초점을 애써 맞추고 학연은 문을 향해 얼굴을 들었지만, 학연을 마주한 단호하고 반듯한 얼굴의 남자는 학연에게 무어라 말 할 틈을 주지 않았다. 

 

“나오시지요.”

 

경멸을 덧입힌다 하여 남자의 얼굴에 드리운 두려움이 쉬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낯선 이의 얼굴에서 이를 읽는 것이 어렵지 않았던 학연은 조용히 입꼬리를 당겼다. 이전과는 확연히 바뀐 복식이 썩 흥미로웠다. 짧은 머리칼과 직선으로 이루어진 옷의 조합이 딱히 못나지는 않다고 학연은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기는 흐르는 모양이지. 학연은 여유로운 얼굴로 남자에게 대꾸했다. 멸시는 잦지 않았음에도 익숙했다. 매서운 눈초리 같은 것들은, 낯설게만 여긴다면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일일 뿐이었다.

 

“무책임한 언사를 행하십니다. 당신의 눈엔 이 족쇄가 보이지 않는다 할 셈입니까?”

 

학연이 일부러 소리 내어 웃었다. 빛도 들지 않는 곳에서, 간신히 잊지 않고 세어 놓은 시간을 손가락을 들어 되짚어보는 학연의 눈에 순식간에 절망이 흩어졌다. 어디 보자, 학연은 절그렁거리는 손목을 들어 셈을 했다. 말라버린 꽃송이가 하나, 둘, 셋, 손가락을 수없이 접었다 펴보았다. 한 송이는 곧 열흘. 산더미처럼 쌓인 꽃을 헤아려보니 마지막으로 방 밖을 벗어난 것은 100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그 기억이 엊그제 같았다. 만물을 우습게 여기는 절대자와도 같은 시간의 태도가, 그 시간 속에서도 스러지지 않는 괴물 같은 제 자신이, 학연은 우스웠다.

 

“이번엔 또 무슨 유희가 필요해서 날 찾은 겝니까?”

 

남자는 떨리는 걸음으로 학연에게 걸어갔다. 다발에서 금빛 열쇠를 골라 학연의 손발을 굳힌 묵직한 쇳덩이를 가볍게 풀어낸 남자는 곧 학연의 침상 위로 하늘거리는 붉은 의복을 던져놓았다.

 

“당신이 별 다른 걸 할 수 있던가?”

 

아, 새 왕이 섰구나. 나를 가둔 자의 멀고 먼 후손이 또 왕의 자리에 올라앉았구나. 몇 백 년이라는 세월이 붉은 비단으로 둘러진 이 작은 방에서 그제야 스쳐간다. 새삼스럽게 어깨를 떤 학연은 남자가 아무렇게나 던져둔 옷을 꾹 쥐어들었다. 이제는, 분노하지 않을 때도 된 것 같은데.

 

“경하의 무도를, 준비할 테니, 시간을 주시오.”

 

남자는 의외로 고분고분한 태도의 학연에 놀란 것인지 답을 머뭇거렸다. 남자를 빤히 쳐다보던 학연은 마른 침을 삼켰다. 이제는 서럽지 않을 때도 되었는데. 고개를 떨어뜨린 학연의 눈에 돌던 한기가 곧 설움을 내뿜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 스스로를 갉아먹는 기분이었다. 학연은 차오르는 신열을 억지로 삼키고 고개를 들어, 남자의 눈을 보았다.

 

“1각이면 족합니다.”

 

의식적인 미소 뒤에 간신히 기대 선 학연이 젖어 빛났다. 붉은 의복 더미에는 그보다 붉은 목단 한 송이가 놓여 있었고, 피로 한 약속은 쉬이 스러지지 않을 것이었다.

 

-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것입니까?”

 

학연의 물음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지하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두 눈은 검은 천으로 가려졌고, 그렇게 한참을 끌려가듯 걸었다. 살갗에 닿아오는 정적이 자못 낯설었다. 지난 즉위식까지만 해도 귀한 진상품 정도였던 학연의 취급이 지금은 노비와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학연을 데려가는 남자들의 걸음걸음마다 쇠붙이 소리가 절그렁거리며 쫓아다녔고, 벗은 발끝에 느껴지는 끈적한 감각은 검붉었다. 

 

“때맞추어 도착했군.”

 

나무로 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방 한가운데에 선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스친 후 학연을 데려온 사람의 경례가 방안에 퍼졌다. 개성에서 ‘가져’ 오느라 수고가 많았네. 이 나라에서 제일 아름다운 무희라 했지? 학연의 눈을 가리던 검은 천이 풀리고,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학연에게 생경했다. 처음 보는 방 안, 낯선 몇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학연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내라고 들었는데, 계집보다 곱구나.” 

 

“아무것도 먹지 않고, 몇 백 년을 이 모습 그대로 살아온 이 땅의 영물(靈物)입니다.”

 

통감님께, 이 자를 바칩니다.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통감이라 불린 자의 눈이 흉흉한 빛을 흘렸다. 

 

“통감이라니, 말은 바로 해야지. 감히 천황폐하가 내려주신 직위를 마음대로 바꿀 셈인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총독님.”

 

크흠. 뭐, 기쁜 날이니 죄를 더 묻지는 않겠네.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둔 총독의 질척한 욕망이 노골적으로 학연을 쓸어내렸다. 

 

“합병축하선물로 매우 귀한 것을 준비 했군.”

 

학연의 얼굴에 짙게 그림자가 졌다. 한참 만에 본 빛은 또 다른 암흑의 시작이었다. 학연은 도리어 서러워졌다. 나를 보러 오겠다고 했다. 꼭 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그는 오지 않고, 그의 나라는 명을 다하였다. 나는 전리품. 약소국의 공물과도 같은 신세가 되었구나. 천천히 학연의 앞으로 걸음을 옮긴 총독이, 고개 숙인 학연의 뺨을 붙잡아 위로 끌어 올렸다.

 

“어디, 그 빼어나다던 노래부터 들어볼까?”

 

“...노래는 하지 못합니다.”

 

총독의 얼굴이 구겨졌다. 벙어리도 아닌 것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명을 거스르는 것이냐! 좋은 날이라 좀 어여쁘게 보아주었더니, 제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구나. 총독이 가벼이 고갯짓을 하자 총독의 곁에 서 있던 군복을 입은 남자가 학연을 향해 검은 쇳덩이를 겨누었다. 철컥, 소리가 짐짓 무겁게 공기를 짓눌렀다. 

 

“네게 선택의 여지는 없다.”

 

“노래는 하지 ㅇ...”

 

타-ㅇ! 검은 쇳덩이 끝에서 굉음이 치솟아 아슬아슬하게 학연의 허벅지를 스쳤다. 옷감이 찢어진 자리에서 흐른 붉은 피가 하얀 학연의 바지를 적시고, 이어지는 총독의 목소리가 쓰라린 상처를 들쑤셨다.

 

“그깟 노래 한 곡조와 목숨을 맞바꾸는 천치는 필요 없지. 쓸데없는 신념을 가진 것들은 아무리 고와도 옆에 두면 머리만 아프거든.”

 

학연이 다리를 휘청이며 입술을 달싹이려던 찰나, 학연을 할퀴던 굉음이 사방에서 순식간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혼비백산한 총독은 부랴부랴 몸을 피했고, 학연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던 남자는 혼란의 주범을 찾으려 다른 남자들과 함께 흩어졌다. 학연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사방은 온통 모르는 것들, 낯선 이들뿐이었고, 다리는 점점 더 아려왔다. 코를 찌르는 화약의 향취 속에서 학연의 시야는 점점 흐려졌고, 학연이 완전히 정신을 잃기 직전에 누군가 학연을 안아 올렸다. 

 

“...ㅇ을 해하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인간들이 많네.”

 

학연은 흩어지는 기억을 끌어 모아 간신히 셈을 하였다. 오늘은, 경술년, 팔 월 이십구 일.

 

-

 

“오늘은 검문을 좀 더 철저히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검고 붉은 천으로 머리를 틀어 올리던 학연이 무슈를 향해 일렀다. 그나마 일전에 추었던 춤은 서양의 음률에 맞추어 추는 것이었기에 여흥 깨나 좋아하는 일본인들 몇 명 들인다 하여 문제가 된 일은 없었지만, 오늘은 간만에 조선의 악기가 등장하지 않습니까.

 

“저도 이리, 조선의 복식을 걸치고 있고.”

 

학연의 웃음에 모자를 고쳐 쓰던 무슈 또한 미소로 화답하였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조선인 중에서도 낯선 이는 아예 들이지도 않았습니다. 악기는, 준비가 다 끝난 겐가?”

 

“오랜만에 잡는 금(琴)인지라 조금 낯설긴 하지만, 문제는 없을 걸세.”

 

한창 가야금을 손보던 원식이 오른손 검지로 금테의 단안경을 슬그머니 올리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곧 시작하도록 하지. 무슈는 곧 문을 조심히 열고, 무대를 가린 커튼 앞에 올라섰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래도 기다리셨습니다. 저는 카페 포이닉스의 무슈, 홍빈이라고 합니다.”

 

꽤나 젊은 사람이 주인이었군 그래. 구석에서 들려오는 웅성임에도 홍빈은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암요, 젊은 주인이 젊은 감각으로 일구어 놓았으니, 모-던한 여가를 즐기시는 여러분께서 굳이 시간 내어 이 자리에 모이신 것 아닙니까.”

 

경성 일대에 이만한 카페 찾는 것이 쉬운 줄 아십니까? 홍빈의 너스레에 관객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자, 자. 오늘은 몹시 특별한 음악이 준비되어 있으니, 더 지체하지 말고 감상하십시다.”

 

홍빈이 무대 뒤로 사라지고, 젖혀진 보라색 커튼 뒤로 학연이 원식의 애달픈 곡조에 맞추어 너울거리기 시작했다. 매혹이라는 단어로 사람을 빚는다면 꼭 학연의 얼굴일 것이 분명했다. 몇몇 여자들은 붉어진 눈시울을 소매로 닦아내느라 분주했고, 남자들은 학연의 소매로 제 가슴 속에 끓어오르는 감흥을 닦아내기를 원했다. 무대가 반절쯤 진행되었을 때, 카페의 입구가 조금 부산스러워졌다. 키가 크고 준수한 사내 셋이 한꺼번에 등장하자 무대 위를 향하던 관심이 그네들에게 잠시 흩어졌지만, 그것도 순간일 뿐이었다. 아마 몇몇은 의식적으로 눈길을 거두었을 것이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온 일행의 몸에서는 미약하지만, 화약 냄새가 났으니까. 남자들은 무대 옆에 조그맣게 난 문을 열고 들어가 무슈를 찾았다. 

 

“정말로 일본인들은 한 명도 보이질 않더군. 재주가 좋아, 무슈는.”

 

눈이 깊은 사내가 주섬주섬 겉옷을 벗어 걸며 홍빈에게 말을 걸었다. 

 

“참, 내가 얼마나 조선의 것을 그리워했는지 아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나.”

 

그리고 정말 재주가 좋은 이들은 무대 위에 서 있는 두 사람이지. 홍빈은 게 중 제일 어리게 보이는 사내의 곁으로 가, 그 자가 건네는 이상하리만치 무거운 아코디언 상자를 받아, 카페 바닥에 붙어있는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형님은 눈속임을 위해 여는 공연에도 참 신경을 많이 쓰십니다.”

 

“아무리 난세라지만, 이런 여유라도 있어야 사람이 사람처럼 사는 것 아닙니까.”

 

상혁군도 그리 생각하지요? 상혁은 창고에 들어가 차곡차곡 정리를 시작한 홍빈의 손에 품에 숨겨온 몇 개의 탄약을 더 쥐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무거운 어깨 위로,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던 얼굴이 하얀 사내의 밭은 기침소리가 스쳤다.

 

“택운형, 괜찮은 겁니까?”

 

“후.. 아, 감상을 방해하여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재환군, 송구하네만 물 한 잔만 주겠나. 내 속에서 자꾸 녹내가 올라와서. 눈이 깊은 남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제 품안을 뒤적거렸다. 재환의 손짓을 따라 쇠붙이들이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잠시 울렸고, 재환은 금방 작은 물병 하나를 꺼내어 택운의 떨리는 손에 쥐어주었다. 입 안을 뒤덮었던 철의 향을 삼킨 택운이 크게 숨을 쉬고,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손에 쥐었다.

 

“음률이 참, 마음에 좋습니다.” 

 

말을 마친 택운은 곧 눈을 감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폐부를 오가는 기류에서 풍겨오는 진한 피비린내는 제 육신의 것이라기보다는, 이름을 잃은 조국의 것이었다.

 

-

 

학연은 옷을 갈아입고 북적거리는 카페 안으로 섞여들었다. 한창 마시고 떠드는 이들 틈에서 분주히 눈을 굴리다, 이윽고 홍빈의 무리를 찾아낸 학연은 하늘거리는 치맛단을 고이 부여잡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오늘 공연도 제대로 못 보았지요?”

 

밉지 않게 투덜거리는 학연의 목소리에 바에서 술병을 찾던 홍빈이 고개를 들고 웃으며 학연을 맞았다.

 

“제 감시가 없어도 잘 할 것 아니었습니까?”

 

학연이 옷소매로 입을 가리고 샐쭉 웃었다. 영락없는 여인의 행색이었다.

 

“그보다, 처음 보는 분들인데 제게도 소개를 시켜주셔야지요, 무슈?”

 

“아, 인사가 늦었습니다. 이재환이라고 합니다.”

 

바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던 재환이 몸을 일으켜, 쓰고 있던 모자를 살짝 들어올렸다. 스물다섯이니, 편하실 대로 부르시지요. 재환의 미소가 썩 편안하여 학연도 따라 웃었다. 건네는 오른손을 맞잡고 악수를 하니 옆에서 또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저는 상혁입니다. 한상혁. 이제 스물 셋이니 이 중 제일 어릴 것입니다. 

 

“다들 반갑습니다. 저는 차.. 연, 연이라 부르면 됩니다.”

 

“이름이 외자인가 봅니다?”

 

높은 의자에 앉아 유리잔을 달그락거리던 택운이 말을 붙였다. 저는 정택운입니다. 스물여덟이고. 웃으며 대꾸를 하려던 학연의 시선이 택운을 향하다 순간 갈 곳을 잃었다. 아니, 아니어야 한다. 대답 없이 고개를 떨어뜨린 학연을 보던 홍빈은, 무언가 좋지 않은 낌새를 눈치 채고 말을 돌렸다.

 

“자, 자. 이제 다들 한 숨 돌렸으니, 술이라도 한 잔 씩 하십시다.”

 

내 자네들에게는 특별히 외상을 다는 것을 허락하도록 하지. 고작 외상이란 말입니까? 저희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왔는지 알면 분명 놀라ㅅ-

 

“형님은, 말을 좀 아끼시는 게 좋겠습니다.”

 

큰 소리로 이야기하던 재환의 입을 틀어막은 상혁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제일 독한 것으로 두 잔 주십시오. 얼마든지!

 

“잠깐.”

 

술을 가지러 움직이던 홍빈의 손목을 조용히 학연이 그러쥐었다. 잠시만, 자리를 비켜주시겠습니까? 학연의 조용한 질문에 홍빈은 눈짓으로 긍정을 표했다. 자, 우리는 온 김에 춤을 조금 추어도 좋겠습니다. 금세 술을 준비한 홍빈이 상혁과 재환을 재즈가 흐르는 카페 한가운데로 밀어내고, 자기도 쫓아 나갔다. 재환의 눈이 아쉽게 학연에게 머물렀다, 곧 술잔으로 빨려들어 갔다. 택운은 눈을 감고 유리잔을 만지작거리다, 학연에게 말을 걸었다.

 

“제 등 뒤에 귀신이라도 있는 모양입니다?”

 

“아니, 그것이 아니라...”

 

“그럼 제가 누구와 닮기라도 했습니까?”

 

학연은 잘게 몸을 떨었다. 가벼이 던진 말임을 알면서도 학연은 그를 부정할 자신이 없었다. 총독의 제물이 될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나게 된 지도 벌써 33년, 폭약이 자욱하던 총독부 건물에서 홍빈의 아버지가 그를 구하지 않았다면 모르긴 몰라도 숨이 끊기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삼을 삶을 살게 되었을 것이었다. 총독부에서 아직도 종종 저를 찾는다는 이야기가 들리기에 혹시라도 신분이 들통 날까 복식마저 여인의 것으로 바꾸고 지내왔는데, 학연은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될 것만 같아 두려웠다. 택운이 갸우뚱하자, 학연은 당황한 얼굴을 감추고 말을 했다.

 

“아주, 오래 전에 만난, 사람과 닮아있어 잠시 놀란 것뿐입니다. 송구합니다.”

 

“성질이 꽤나 고약한 사람이었나 봅니다? 닮은 얼굴만 보아도 그리 겁을 집어 드시는 걸 보니.”

 

학연은 입술을 물었다. 그 옛날 저를 다시 보러 온다 해 놓고 결국은 영원히 가두었던 이의 얼굴을, 이렇게 마주하게 될 줄은 학연도 미처 몰랐다. 학연은 눈을 지그시 감고 택운에게 답했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고 믿고 싶습니다.”

 

어딘가 모르게 씁쓸한 표정을 짓는 학연에 택운은 입을 닫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이유도, 세상에 이렇게 고운 사람은 두 번 다시없을 아름다운 행색임에도 어쩐지 사내라는 생각이 드는 연유도, 모조리 알아내고 싶었지만 택운은 학연을 괴롭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택운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저는 좋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던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어떤.. 글을 쓰십니까?”

 

“신문에 기사를 싣기도 하고, 시를 쓰기도 합니다.”

 

모두 조국을 위한 문장들뿐이지요. 작지만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택운을 학연은 마음껏 빈정거리고 싶었다. 조국, 조국이라. 

 

“만일 그 조국이 당신을 버린다 하여도, 당신은 조국을 위할 수 있을까요?”

 

어쩐지 좀 전 보다 한참 날이 선 학연의 말씨에도 택운은 꽤나 의연했다. 근 몇 년을 들어온 질문을 빙자한 비아냥. 네가 그렇게 목숨 바쳐 지키려는 조선이, 대체 널 위해 무엇을 해 주었느냐. 많은 사람들이 코웃음을 쳤지만, 그럴 때마다 택운은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조국 없이는 제가 없으니까요.”

 

“꽤나 운명성이 짙은 이야기를 하십니다. 조국이야 어찌 되었던 간에 우리는 모두 이리 살아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저 조선의 활자, 문장, 그 혼백을 사랑할 뿐입니다. 그것이 곧 제 조국입니다.”

 

“뭐, 그런 이유라면 납득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활자와는 친하지 못해서.”

 

“그대가 조선어로 하고 있는 모든 생각과 말들이 전부 조국이 아닙니까.”

 

그대가 원하는 그 모든 것들이, 조선이 아닌 곳에서도 온전할 수 있을지, 사유하여 본 일이 있습니까? 당신이 좋아하는 노랫말, 춤사위 혹은 당신의 이름 두 자는요? 

 

아, 저 남자가 지키고 싶은 것은, 기실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백성들의 비범치 못한 일상이 전부였다. 학연은 문득 제가 이 남자의 간절함을 기만하려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참을 수 없이 부끄러운 마음이 되었다. 

 

“송구합니다. 무례를 범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이해합니다.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택운의 눈빛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학연은 꽤나 미안한 눈을 하고 택운을 보다 꼭, 그 날의 표정과 같은 것을 알고 얼마 못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저를, 가두고, 재회를 약조하던, 그 날과 같은, 저를 안심시키려는 웃음이었다. 아니야, 잊어야 한다. 지금 이 사람은 그 때 그 사람과 같은 얼굴일 뿐, 같은 사람은 아니지 않나. 떨리는 목소리로 학연은 서툴게 말을 돌렸다.

 

“저는 글재간이 없어 도움은 못 될 듯합니다.” 

 

“춤을 잘 추시지 않으십니까. 저는 제 육신 하나 건사하지도 못하는 걸요.”

 

“제... 춤을 보셨습니까?”

 

택운은 새삼스러운 것을 묻는다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유리잔에 담긴 물을 마셨다.

 

“포이닉스의 무용 공연은, 경성에서 제일로 유명하지요.”

 

학연이 여지껏 제 조국을 비웃었음에도, 택운은 학연의 무도를 아껴 말했다. 상당히 상냥한 처사였다. 학연의 목소리가 조금 더 기어들어갔다.

 

“...직접 보신 일은 없으십니까?”

 

“송구합니다, 옥살이를 꽤 오래 했더니 꼭 갇힌 것 마냥 있는 게 편안한 일신이 되었나 봅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를 농처럼 늘어놓으며 택운이 너풀너풀 웃었고, 딱딱하게 굳어있던 학연의 표정이 그를 따라 조금씩 풀렸다. 복식, 말씨,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의 얼굴, 학연이 아끼던 그 모든 것들이 시간 앞에 속절없이 몰락만을 반복해왔는데, 그런데, 수 백 년 전 자신을 달래던 그 미소가 학연을 향해 다시 밝아지고 있었다. 눈앞에 겹쳐오는 시간을 침강시키는 두 얼굴의 중첩을 감당하며 학연은 저도 모르는 새에 익숙한 안도감에 젖어갔다. 학연은 문득, 그 시절의 이야기를 택운에게 해도 좋을지 고민했지만, 곧 그 마음을 포기하였다. 분명 같은 얼굴이지만, 꼭 다른 기억을 가졌을 테니. 학연은 그 대신, 그리운 얼굴을 다시 보게 해 준 데에 대한 작은 감사의 인사 정도는 하고 싶었다.

 

“그럼, 지금 보시면 좋겠습니다.”

 

바에서 일어난 학연이 카페 중앙으로 사뿐히 걸어 나갔다. 쌍쌍이 손을 잡고 춤을 추던 사람들이 학연을 위해 - 아니 학연의 춤을 보기 위해 - 자리를 비워주었고, 학연은 택운을 객석의 중앙으로 두고 흐르는 곡조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볍게 떨어지는 발걸음은 마치 고양이가 가느란 나뭇가지를 걷는 듯했고, 하늘하늘 움직이는 두 팔은 신조(神鳥)의 날갯짓만 같았다. 하얀 장갑을 낀 손끝이 허공을 간질이고, 무릎까지 오는 다홍빛의 치맛자락이 살랑거렸다. 학연은 웃으며 한 바퀴 제자리를 돌고는, 멍하게 자신의 춤사위를 바라보고 있는 택운의 자리로 다시 걸어갔다. 목에 묶인 하얀 스카프를 풀어 택운의 손목에 묶어 놓은 학연이, 택운의 팔을 잡아당겼다. 스카프의 끝에는 붉은 목단 한 송이가 수 놓여 있었다. 한 곡조, 하시지요. 허공에 학연의 웃음이 발갛게 흩어졌다. 조국을 되찾아야만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나는 순간은 퍽 아름다웠다.

 

 

 

 

 

 

 

 

 

 

 

 

 

 

 

 

-

 

달랑- 카페 포이닉스의 문에 달린 작은 방울이 반가운 울림을 만들었고, 무대 옆에 딸린 방문을 열고 나오던 학연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그 소리를 향해 돌아갔다. 곧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얼굴에 만면에는 웃음이 가득했지만, 말은 일부러 조금 퉁명스럽게 뱉어 보았다.

 

“이리 자주 오시는데도, 해고를 당하지 않으시는 게 용합니다.”

 

“글은 어디서든 쓸 수 있는 것이니까요.”

 

택운이 웃으며 익숙하게 바에 앉았고, 학연도 또각또각 걸어와 택운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홍빈이 짐짓 신기하다는 목소리로 택운에게 말을 붙였다.

 

“택운형도 용합니다. 벌써 두 달 째 매일같이 오십니다, 그렇게 자기 방을 좋아하시는 분이?”

 

“바깥소식을 들려 달라 제가 귀찮게 굴어 그런 것인데, 심성이 온화하시어 이리 와주시는 것 아닙니까. 무슈가 그리 놀려서 이제는 아니 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학연이 작게 홍빈을 향해 툴툴거렸다. 여전히 외출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는 학연에게 택운은 매일같이 찾아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운이 좋게도 그 동안은 자신이 투입되는 거사가 없어 가능한 일이었다. 택운은 학연의 귀여운 투정에 웃음을 보이면서 애써 불안한 기색을 감추었다. 언제든 조선의 해방을 위해서라면 주저 없이 목숨을 내어 놓을 것이라 스스로에게 했던 다짐이, 자꾸만 학연의 미소 끝에서 생을 향한 욕심으로 변했다. 이미 쇠할 대로 쇠한 자신의 몸뚱이가, 조금이라도 더디게 스러졌으면 싶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십니까?”

 

해주실 이야기가 없어 지어내시기라도 하는 겁니까? 불쑥 택운의 눈앞에 손을 뻗어 위아래로 손을 흔드는 학연의 표정이 부루퉁했다. 그 얼굴이 참으로 어여쁘다 생각한 택운은 최선의 웃음으로 고개를 도리질치고는, 홍빈의 농에 뒤늦게 대꾸했다.

 

“좋아하는 것이 비단 제 방뿐이겠습니까?”

 

이야, 역시 글을 업으로 삼으시는 분은 하시는 말씀도 남다릅니다, 그래. 홍빈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술잔을 닦았고, 택운은 학연을 더없이 애달픈 눈으로 보았다. 학연의 볼이 보기 좋게 붉은 빛을 띠었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해주시려고 오셨습니까?”

 

“음... 오늘은 바깥 이야기는 아니고.”

 

택운은 학연이 가져온 유리잔을 만지작거리며, 홍빈에게 말을 붙였다.

 

“옛날이야기를 좀 해볼까 하는데.”

 

“그거 좋지요. 얼마나 옛날이면 되는 겁니까?”

 

“원식군이 오른쪽 눈에 단안경을 쓰기 시작할 때 즈음?”

 

퍽이나 옛날입니다. 홍빈이 투명한 위스키 잔을 조명에 이리저리 비추어 보며 대답했다.

 

“옛날이지요. 나라의 운명이 달라졌으니.”

 

달랑, 포이닉스의 문이 열리고 낯익은 인영이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본 학연이 풋 웃음을 터뜨렸다.

 

“연이양은 왜 저리 파안대소 하고 있는 겁니까?”

 

“원식군도 양반은 못 되는 가 봅니다.”

 

“형은 또 무슨 소리입니까? 제 험담이라도 하고 계셨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입을 가리고 웃고 있던 학연이 불쑥 대답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택운이 말을 이었다.

 

“원식군한테 안경이 생긴 날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원식은 어색하게 왼쪽 얼굴을 쓸어내렸다. 벌써 오 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대로 안경을 벗은 원식은 하얀 셔츠 끝을 잡고는 손끝으로 조심스레 금테의 단안경을 닦았다. 

 

“가야금 줄이 그리 날카로울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괜히 열채를 잡고 있던 재환형만 놀라고 말입니다.”

 

튀어 오른 안족(雁足)에 어깨를 맞는 정도로 끝난 것이 다행이었지요. 장구를 영영 못 치게 되는 것은 면했으니. 홍빈이 태연하게 다음 잔을 집어 들며 말했다.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도자기의 옥빛이 예뻐 학연은 말없이 홍빈의 손을 따라 눈을 옮겼다. 

 

“그래도 그 날 공연 덕에 상혁군이 우리에게 왔으니, 영 쓸쓸한 기억만은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사실 하모니카에 능한데. 연이는 본 일이 없지요? 학연은 올망한 눈망울로 원식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뭐, 저는 늘 이 곳에 있을 테니 언젠가는 듣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형은 아우가 왔는데 눈길 한 번 안 주십니까?”

 

이야기를 듣던 학연이 문득 택운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 곳엔 테이블에 왼팔을 올린 채 턱을 괴고 하염없이 자신을 좇는 부드러운 시선이 있었다. 학연의 볼록 솟은 양 뺨에 수줍음이 올라오고, 마주친 눈빛이 꼭 노을만치 따뜻했다. 말없이 입꼬리를 당겨 학연을 향해 웃어주던 택운이 학연에게 물었다. 연이는 이 카페 이름이 포이닉스(Phoenix)인 연유를 궁금히 여기어 본 일이 있습니까? 

 

“아아니요, 저는 그저 무슈에게 공연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온 것뿐인걸요.”

 

무슈의 아버지 부탁도 있었지만... 학연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 전까지는, 정말로 작은 방 안에 우두커니 있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아주, 오래요... 학연의 문장이 잦아들었다. 택운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오랜 시간이었다. 풀이 죽어버린 학연의 눈치를 살핀 택운이, 급히 말을 이었다.

 

“포이닉스는 사실 제가 지어 준 이름입니다.”

 

한문으로 적자면 불사조(不死鳥) 정도가 되겠군요. 포이닉스는 죽음 끝에서 끊임없이 부활하는 서양의 길조라 합니다. 

 

“우리 조선의 것으로 이야기를 옮겨 보자면, 봉황과 비슷하겠군요.”

 

저는 이 곳에서 죽음이 삶으로 뒤바뀌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택운은 진실로 조국의 부활이 보고 싶었다. 부러 학연에게는 억압된 현실에 대한 이야기들은 자제하였지만, 해방전선에 몸을 던지기를 갈망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거쳐 가는 이 곳에 오랫동안 머물러 온 학연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의 몸에서는 종종 탄약과 혈액의 냄새가 났고 그 모든 것은 결국 자주조선을 향한 그리움의 향취였다. 문득 고개를 돌려 살핀 학연의 표정에는 참 많은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었다. 택운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연이가 추는 무용이, 부활의 상징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제가... 추는 춤이요?”

 

“그럼요. 그 불꽃과도 같은 춤은 봉황의 날갯짓과 불사조의 화염을 떠오르게 합니다.”

 

불길이 만든 잿더미 속에서 부활하는 것이 불사조이니까요. 택운이 학연의 떨리는 손을 지긋이 잡아 주었다. 일전에,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연이는 글재간이 없어 조국을 위해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하였지요?

 

“그대로 불꽃같이, 어여쁘게 타올라주세요.”

 

그것이 조국을 위한 일이 될 겁니다. 위험한 일은 제가 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이 안에서 부디 평안하게 있어주세요. 택운은 다 하지 못한 뒷이야기들을 눈으로 뱉었다. 학연은 마주쳐오는 시선이 하는 간곡한 청을 차마 거절치 못하고 눈물을 글썽였다. 학연도 모를 수 없었다. 아무리 모르고 싶다 한들, 이 곳을 거쳐 가는 이들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사실 택운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리 마음을 쓰지 않았지만, 택운이 타오르는 독립의 갈증을 눈빛에 선연하게 띄운 채로 제게 전하는 일상의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애국심은 못되어도 그에 준하는 알 수 없는 달뜸이 속에서 점점 부피를 더해가는 것은 학연도 부정할 수 없었다. 조국이 무어 별 거였겠는가, 지키고 싶은 춤, 노래, 이야기, 얼굴이 곧 조국이지. 그를 깨닫고 나서 학연은 더 열심히 춤을 추었다. 제 무대를 보는 동안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가슴에 떠안은 망국의 무게를 잊었으면 해서. 그래서 학연은 택운을 향해 환히 웃었다. 임금이 곧 조국이었던 수 백 년 전, 자신을 가둔 조국이, 지금은 제 연인이 되었다는 그 모순을 견디기 위해서라도 웃어야 했다.

 

Drrrrrrrrrr-

 

"네, 카페 포이닉스입니다.“

 

학연의 대답을 가리며 카페 안을 울리는 전화를 받은 홍빈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네, 한 잔은 위스키. 두 잔은 환화정종. 마지막 잔은... 네, 알겠습니다.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종이에 무언가 급히 휘갈겨 쓴 홍빈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택운형, 오붓한 시간을 방해해서 송구하지만 잠시 시간을 좀 내셔야겠습니다.”

 

순식간에 카페 안의 공기가 차게 식었다. 택운은 자못 심각한 얼굴로 학연의 손을 더욱 세게 쥐었다 이내 힘을 풀었다. 학연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 이제는 학연을 지킬 수 없는 노릇이 되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잠깐! 학연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택운의 손목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이렇게 써도 좋은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꼭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화무십일홍이라 하였습니다.”

 

열흘 붉은 꽃이 없고 백 년을 가는 권력이 없듯, 그들이 조선을 향해 휘두르는 악(惡)도, 언젠가 반드시 시들 것입니다. 순간 학연을 바라보던 택운의 눈앞에 섬광이 스치고, 택운이 그대로 혼절했다. 택운이 본 빛줄기, 생을 넘은 기억의 조각이 택운의 폐부를 들쑤셨다.

 

-

 

한 번 성한 것은 시들기 마련이라는, 그들 스스로를 향한 간단한 위로는 어쩌면 인간들의 생이 그야말로 한 때 인 것에서 오는 겁의 표상이었다. 태초의 인간들은 열흘이고 열 달이고 목단같이 피어있는 학연을 경외했다. 까맣게 흩날리는 머리칼을 찬미했었고, 꽃 같은 안색을 기꺼워했었으며, 보드라운 미성을 아꼈었고, 가늘게 진동하는 무도(舞蹈)를 사랑했었다. 학연에게는 그들의 애정을 거스를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웃고 싶을 때 얼굴을 펴고, 노래하고 싶을 때 입을 열며, 춤추고 싶을 때 몸을 움직이는 더없이 즐거운 삶이었다. 나라의 이름이 몇 번을 바뀌도록 학연은 머리카락 하나 희게 새지 않자, 그 축복 같던 영원은 곧 학연을 태울 불씨가 되었다. 스물한 살의 나이로 용상에 오른 임금은 쉼 없이 변하는 세태 속 유일한 불변을 흉조(凶兆)라 여겨 학연을 향한 모든 찬양을 자신을 향한 비난으로 바꾸어 씹어 삼켰다. 신하들은 쉽게 옆에서 속삭였다. 전하, 그 자는 마물(魔物)이나이다. 수백 해를 주름살 하나 없이 살았다 하였나이다. 온 백성들이 그 자를 알고 그 자의 춤과 노래를 즐거워하며 따르니, 가만히 두었다간 필히 전하의 자리를 넘보고 고려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옵나이다. 

 

“전하, 전하의 존함을 마지막까지 기억하소서. 전하는 이 나라를 윤택하게 이끄실 위인이시나이다.”

 

위인의 앞길을 막는 것은,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 한들 말려 없애야 하나이다. 난세를 다스려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진 젊은 왕, 그 뱃속에 심긴 공포는 주변의 걱정을 받아 마시며 싹을 틔웠다. 결국 검붉게 피어난 겁은, 흑진주 같이 단단하고 새까만 살육의 결심을 맺고 말았다. 목단을 심기 좋은 9월의 어느 날이었다.

 

“소인, 전하를 알현하나이다.”

 

비단으로 눈부신 의복들과 화려한 건물들에 정신이 팔린 학연은, 제 몸을 죄는 붉은 포승줄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채 전각 앞뜰에 웃으며 섰다. 신도 채 챙겨 신지 못하고 끌려나온, 붉게 벗겨진 발바닥은 죄인의 것이 분명하였으나, 세상 구경을 처음 나온 어린 아이처럼 근원적인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학연의 눈빛에 임금은 멈칫했다. 수없는 숙청의 반복에서도 느끼지 못한, 흡사 자괴감과도 같은 감정이 임금의 머릿속을 낯설게 어지럽혔다.

 

“어떤 것이 보고 싶으셨기에 저를 이리 어여쁜 곳으로 부르셨나이까?”

 

해맑은 학연의 목소리가 붉게 흩날렸다.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된 임금은 작게 탄식했다. 고작 40년을 조금 더 산 자신이 몇 백 년을 살아온 학연보다도 더 속물인 것 같았다. 순식간에 학연 앞에서 나신의 부끄러움을 맛 본 임금은, 학연의 뒤에서 칼을 뽑아 든 장수를 제지하고, 학연에게 대답하였다.

 

“네가 제일 잘 하는, 노래를 해 보거라.”

 

춤은, 훗날에 볼 것이다. 전하! 학연을 제거하는 것을 가장 강하게 요구했던 신하가 다급하게 임금을 불렀다. 임금은 신하에게 손을 뻗었다. 

 

“아무리 난세라고는 하나, 노래 한 곡조 들을 여유도 없이 사는 것은 참으로 가여운 일이 아닌가?”

 

임금은 학연을 향해 작게 웃어 보였다. 반은 연민이요, 반은 부러움을 담은 미소였다. 여전히 줄에 팔다리가 묶인 학연은 한 치의 의구심도 없이 임금을 향해 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춤을 추는 치맛자락인가

퇴색해가는 금빛 하늘인가

찰나의 한순간만 아름다운 것

그중에 하나가 바로

사랑

 

새벽에 핀 은빛 목련인가

나비가 벗고 떠난 허물인가

세상에 모든 아름다운 것 중에서도

가장 쉽게 시드는 것

사랑

 

학연의 미성이 궁을 울릴 때에는, 실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칼을 쥐고 있던 장수의 손은 힘을 잃었고, 학연을 처단해야 한다 입 아프게 외쳤던 대신들의 얼굴에도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 순간의 학연은 위협도, 반역도 아니었다. 하지만 죄인의 신분으로 끌려 온 학연을 이대로 궁 밖으로 풀어주기에는, 그 일로 임금의 책을 잡아 난을 일으킬 만한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있었다. 또한 이대로 내보내었다가는 학연의 목숨도 위태로웠다. 임금은 결국 학연을 어쩌지 못하고 궁궐 제일 깊은 곳, 제일 어두운 지하에 학연을 꽁꽁 묶어 가두었다. 손발을 짓누르는 쇳덩이에도, 학연은 그저 웃었다. 그 모든 일을 지켜보던 임금이, 간간히 학연을 향해 웃어주었기에. 

 

“내 언젠가는 그대의 춤을 보러 다시 오겠소.”

 

“그것을 제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맹랑한 질문을 하는 게냐! 문지기가 학연을 향해 매서운 말을 뱉었고, 임금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내, 약조를 하마.”

 

임금은 제 오른손 엄지를 물어, 피를 보고는 옥의 문에 글을 썼다.

 

花無十日紅

 

“열흘 붉은 꽃은 없다지만, 만약 네가 내내 붉어있다면 나는 반드시 너를 보러 오마.”

 

그러니 제발 성하게 남아 있으라. 나라가 평안해지면 꼭 다시 널 보러 올 것이다. 학연에게 제일 잘 어울리는 붉은 비단으로 치장한, 옥의 문이 굳게 닫혔다. 만약 네가 악이고 권력이 아닌 다른 무언가라면, 그리 쉬이 쇠하진 않겠지. 붉은 꽃, 목단 같은 자였다. 하지만 나는 네가 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꽃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너는, 그리 아름다운 노래를 하던 너는.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 의심과 믿음이 뒤섞인 괴이한 감정을 받아내며 닫힌 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던 임금은, 입술을 깨물며 제 이름을 되뇌이다 철문을 지키고 선 문지기에게 일렀다.

 

“열흘에 한 송이 씩, 이 문 틈으로 목단을 넣어 주거라.”

 

혹, 내가 오는 데 시일이 다소 걸리더라도, 그것으로 시간을 가늠할 수 있게. 저 자를 닮은 붉은 목단으로. 임금은 간신히 피가 멎은 제 손가락에서 다시 피를 보았다. 임금이 흘린 피는 철문의 바깥쪽에서 다시 넉 자의 한문이 되었다. 그리고 임금은 곧 문지기의 갑옷에도 피로 글을 적었다.

 

救國干城(구국간성)

 

“내 피를 흘려 한 명이니, 무슨 일이 생겨도 지켜져야 할 것이다.”

 

“분부 받잡겠나이다.”

 

나라를 구하는 방패와 성. 무거운 명령을 하사받은 문지기의 대답을 듣고 서야 임금의 발걸음이 떨어졌다. 임금은, 다시 자신의 이름을 읊조렸다. 

 

윤택하게(澤) 끌어가라(運). 나는 과연, 잘 하고 있는 걸까.

 

그 날 밤, 난생 처음 겪어보는 마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술잔을 기울이다 잠이 든 임금은 자신을 지켜야 할 신하들에 의해 초라하고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칼자국이 낭자한 임금의 몸뚱이 위로 붉은 꽃잎이 흩날렸다. 그렇게, 망국은 태어났다.

 

-

 

“정신이 드십니까?”

 

의식이 돌아온 택운의 시야에는 홍빈과, 새하얀 병동의 침구뿐이었다.

 

“연이는, 연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럴 줄 알았습니다. 좀 전까지 곁에서 엉엉 울던 것을, 연이마저 쓰러질까 걱정되어 포이닉스로 돌려보냈습니다. 아마 재환형이 함께 있을 것입니다.”

 

자기 몸을 좀 더 돌보란 말입니다. 홍빈이 한숨을 쉬며 말을 덧붙였다.

 

“이리 약한 사람이, 조국을 어찌 해방시킬 수 있단 말입니까?”

 

조국, 조국이라는 단어가 홍빈의 입에서 조형되자마자 택운은 금방 무의식을 타고 흘러온 아득한 기억을 떠올렸다. 내가, 물론 그것은 지금의 내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어찌 되었던 내가.

 

“가두었다.”

 

학연을. 그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어둡고 외로운 곳에 학연을 가두었다. 가두고 말았다. 혼잣말을 지껄이던 택운을 보는 홍빈의 얼굴이 굳어졌다. 

 

“...봉황은 본디 태평성대에 볼 수 있는 길조라 하였습니다.”

 

“홍빈..군...?”

 

“또한 스스로 노래하고 스스로 춤을 추는 새라 하였지요.”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 겁니까, 홍빈군은?”

 

택운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 하자, 홍빈이 그를 가로 막아 다시 자리에 눕혔다.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구국간성의 후손이 감히 부탁드립니다.”

 

홍빈을 떼어 놓으려던 택운의 손에서 탁, 힘이 풀렸고, 두 눈은 허공에서 갈 길을 잃었다. 홍빈의 표정이 되려 덤덤했다.

 

“아버지의 까마득한 아버지부터 내려온 유언이었습니다. 환생이라느니, 영물이라느니 하는 것들은 영 제 취미랑은 거리가 멀어 반은 헛소문이겠거니 하며 살았는데, 형이 카페의 이름으로 포이닉스를 주신 것을 보고 한 번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신기합니다. 기억을 하지 못할지언정, 형의 눈에 연이는 늘 봉황이었나 봅니다. 아, 목단이 아니었구나. 연약한 꽃 한 송이가 아니라, 이 땅의 운명을 가르고 나는 불사조였구나, 연이는. 택운은 멍한 표정으로 한 줄기 회한을 눈가에 띄웠다.

 

“내가... 내가 풀어주었어야 했습니다. 자유로이 날아갈 수 있게 두었어야 했습니다.”

 

“형님이 지키지 않았으면, 꺼졌을 목숨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감싸는 택운의 등을 홍빈이 잘게 두드렸다. 잘 하셨습니다. 지키신 겁니다. 세상으로부터 떨어뜨려 놓음으로, 연이를 지켜내신 겁니다. 

 

“하지만... 다시 보러 오겠다는 약조를, 같은 얼굴로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500년도 더 지났다지만, 한 나라의 임금이 피로 한 약조는.”

 

쉬이 잊힐 것이 못 됩니다. 그제야 택운은 연이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자신을 향해 흔들리던 눈빛, 주저하며 조국을 이야기하던 목소리, 그리고. 택운은 떨리는 손으로 제 셔츠 앞주머니에 넣어 놓은 학연의 스카프를 꺼냈다. 웃으며 제 손목에 묶어 주었던 스카프 귀퉁이에 수 놓여 있던,

 

“붉은 목단...”

 

택운이 잘게 떨었다. 짐승 같은 택운의 오열이 병동을 뒤흔들었다. 볕 한 줄기 들지 않는 지하실에서 시든 목단처럼 숨 쉬었을 학연의 매일이 택운의 눈앞을 어지럽혔다. 얼마나 오랜 날들을 기대로 채웠을까, 원망은 어떻게 끝나지 않는 학연의 하루들을 괴롭혔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보며 또 어떤 기대를 하고 상처를 받았을까.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기에 가늠할 수 없는 죄책감이 택운의 목을 졸랐지만, 그것도 곧 홍빈의 한 마디에 멎고 말았다.

 

“이번, 거사를 완수하면.”

 

정말로, 학연이를 자유롭게 하실 수 있을 겁니다. 봉황이 스스로 노래하고 춤추며 노니는, 태평성대. 해방된 조선. 학연의 자유. 흐린 눈의 택운은 핏기 없는 손으로 학연의 스카프를 꼭 쥐었다.

 

“...연이에겐 비밀로 합시다.”

 

이번엔 홍빈이 눈을 감았다. 혼란스러운 시절도, 그 시절을 몸 바쳐 일으키려는 사람도 570년 전과 다른 것이 없었다. 하지만, 결말은 달라야만 했다. 

 

-

 

 

 

 

 

 

 

 

 

 

 

 

 

 

 

 

 

 

쿠궁, 쿠궁. 세 남자가 앉아있는 1월의 객실에는 냉기만이 감돌았다. 

 

‘잠시 후, 열차가 북경역에 도착합니다.’

 

그 기나긴 고요를 깬 것은 열차의 안내방송이었고, 음성이 멎자마자 기자의 복색을 한 택운이 장갑을 벗고, 제 왼손을 물어 피를 내었다.

 

“아니, 이게 무슨 짓입니까?”

 

“유언, 같은 것이라 생각하십시오.”

 

“그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시오!”

 

일본군 장교의 행색을 하고 갈색 가죽 가방을 정리하던 재환이 택운을 나무랐다. 맞은편에 놓인 커다란 아코디언 케이스를 닦던 일본 귀족 행색의 원식이 담담한 목소리로 재환에게 이야기했다.

 

“돌아오지 못할 확률이 더 높은 일 아닙니까.”

 

재환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이윽고 기차가 멈추고, 객실 통로에 사람들이 북적이기 시작했다. 원식이 오른쪽 눈에 걸려 있는 단안경을 고쳐 썼고, 재환은 제 얼굴을 매만졌다. 

 

“이제, 가 봅시다.”

 

택운이 금세 피가 스며든 스카프를 곱게 접어 제 안주머니에 집어넣고, 장갑을 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객실 밖을 나서면 더는 조선어를 쓸 수 없겠지. 택운은 그게 자못 아쉬웠다. 하여 택운은, 제 입 밖으로 내던져질 마지막 조선어를 기념했다.

 

“연.” 

 

내가 지켜야 할 단 하나의 조국. 그대를 안 지금은 결코 전과 같을 수 없어, 나는 그대 숨 쉬는 이 곳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 보려고 한다.

 

-

 

“부산과 북경을 잇는 이 기찻길이, 황국의 신민들과 황국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임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여 주신 모든 분들께서도 이미 잘 알고 계시리라 사료됩니다.”

 

황국 신민 같은 소리 하네, 재환이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문장을 우물거렸다. 성대하게 열린 열차 개통식에는 많은 일본의 고관대작들이 참석했고, 그 때문에 경비 또한 한층 삼엄했다. 홍빈이 힘 써준 덕에 기차는 어렵지 않게 탔지만, 직접 식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한정적이어서, 일본군의 행색을 한 재환과 기자의 행색을 한 택운만 간신히 입장했다. 원식은 식장 밖에서 악기 케이스를 들고 바쁘게 눈을 굴렸다. 장총으로 총독만 사살하려던 작전은 실패, 두 번째 계획을 실행해야 했다.

 

툭.

 

그 순간 작은 돌맹이가 원식이 들고 있던 악기 케이스를 두드렸고, 그 쪽으로 눈을 돌리니 검은 가방 하나가 놓여 있었다. 원식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곧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원식은 검은 가방과 제가 들고 있던 악기 케이스를 바꾸어 놓고, 가방 위에 놓여 있던 쪽지를 읽었다.

 

[아무래도 위스키가 엎어졌으니 환화정종이 좋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무사히 들어가신 것 같으니, 이것도 부디 잘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다급한 쓰인 모양이었지만, 분명히 상혁의 글씨체였다. 아마도 폭탄점화장치가 든 가방일 것이다. 몇 개의 폭약을 가지고 들어간 재환에게 무사히 전달해야 했다. 원식은 주위를 살핀 후 그대로 쪽지를 입에 넣고 삼켜버렸다. 다시 한 번 가방을 확인한 원식은 검지로 단안경을 고쳐 올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원식이 제법 멀어지자, 상혁은 순식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원식이 놓은 악기 케이스를 챙겨 사라졌다.

 

-

 

“먼 걸음 하셨습니다. 이리 축하를 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소위님.”

 

“아닙니다, 이게 다 총독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위대한 발전 아닙니까.”

 

“과찬이십니다. 전부 천황폐하의 은덕이지요.”

 

은덕이라, 하. 재환은 금방이라도 발목에 고정시켜 놓은 권총을 뽑아다 총독의 머리를 날리고 싶은 속을 간신히 달래며 악수를 해 오는 총독을 향해 웃었다. 좋아, 총독이 경계하는 눈치는 아니라 다행이었다. 이제 원식에게서 기폭장치만 받아오면 된다. 하지만 재환은 이 순조로운 진행 속에서 알 수 없는 불안을 겪어야만 했다. 홍빈이 어련히 잘 준비해 놓았겠지만, 더욱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재환은 욱신거리는 왼쪽 어깨를 매만졌다. 그 날처럼,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던 그 때, 재환은 저 멀리서 검은 가방을 들고 걸어오는 택운과 눈이 마주쳤다. 입구의 검문이 꽤 까다로웠는지 예상보다 조금 오래 걸리긴 했지만, 표정이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들키지 않고 원식에게서 잘 받아 온 모양이다. 좋아. 택운이 연회장 구석 흰 기둥 뒤로 사라졌다, 곧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다음으로, 오늘 이 개통식을 더욱 빛낼 축하 공연이 있겠습니다.”

 

재환은 인파를 헤치고 조심스럽게 택운이 가방을 두었을 기둥 뒤로 숨어들었다. 예상대로 기둥 뒤 좁은 공간에 검은 가죽 가방이 하나 놓여 있었다. 폭약이 들어있어 제법 무거운 가방을 조심히 한 손으로 든 재환의 귀에, 불현듯 낯익은 목소리가 파고들어 일순간 재환의 전신을 얼렸다.

 

“자랑스러운 황국의 신민으로서, 대일본제국의 무한한 발전을 도모할 원대한 첫걸음이 될 오늘의 이 철도 개통식을, 보잘 것 없는 재능으로나마 열렬하게 축하할 수 있게 된 것을 참된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연회장의 풍경을 카메라에 옮겨 담는 척 바지런히 재환의 뒤를 살피던 택운은,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쉽게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모든 이들이 무대를 보고 있을 이 시간은 분명히 폭약을 무대 한가운데로 옮기기 좋은 기회였고, 우리는 무대가 끝나기 전에 총독을 비롯한 단 한 명의 고관대작도 살아 나가지 못하게, 확실하게, 폭약을 터뜨려야했다. 여지껏 해왔던 그 어떤 작전보다도 실로 위험한 거사였다. 그런데, 들려서는 안 되는 “환청”이 연회장을 울려서, 카메라를 쥔 택운의 손을 아슬아슬하게 뒤흔들었다. 아니 될 일이었다. 그대는 경성에, 포이닉스의 무대 위에 있어야 했다.

 

“황국을 향한 저의 애정을 담아 이 노래를 바칩니다.”

 

애정? 황국을 향한? 조국의 목소리로 형체를 갖추어가는 그 역겨운 단어들을 참지 못하고 결국 택운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믿고 싶지 않은,

 

“연아...”

 

붉은 비단을 입고 맨발로 원수의 발전을 기념하려는 나의 조국, 차학연. 

 

-

 

한 편 연회장 밖에서 다시 만난 원식과 상혁은 분주히 근처 제일 높은 건물의 옥상으로 숨어들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분주히 장총을 조립하는 원식에게, 상혁이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폭탄을 정리하며 말을 걸었다.

 

“기폭장치가 잘 전달되지 않으면, 세 번째 계획을 실행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래야겠지. 어떻게든 폭약은 터뜨려야 하니까.”

 

“...형은 두렵지 않으십니까?”

 

형의 눈, 제가 형을 처음 본 날, 전 총독을 암살하려다 그렇게 되신 것 아닙니까? 총기조립을 마치고 안경을 쓰지 않은 왼쪽 눈을 조준경에 맞춘 원식의 손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 때에도 폭탄으로 작전을 변경했었지요.”

 

날아오는 파편이 재환형의 왼쪽 어깨에 스쳤고, 내 오른쪽 눈에 박혔던 그 날의,  

 

“어떤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까?”

 

그 날은 어쩌면 그저 운이 좋았던 것 아닙니까.

 

“형은 두렵지 않으십니까?”

 

원식은 연회장 입구를 지키는 순사의 오른쪽 눈을 향해 침착하게 총구를 겨누어 놓고 상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날, 그 곳에서 용감하게 팔을 휘두른 소년이 있었잖습니까.”

 

그저 구경꾼으로 지나가는 것이 더 안전했을 상황에서, 우리를 위해 수류탄을 던진 상혁군의 그 마음이 곧 조국인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원식이 가볍게 웃었다. 발 아래로 굴러온 수류탄을 순사들을 향해 집어던질 생각을 했던 용감한 사람이, 지금은 왜 그리 고민이 많아진 겁니까? 상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태극기를 나누어주던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여럿의 목숨이 걸린 만큼 상황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겁은, 지켜야 할 것이 있을 때 비로소 피어나는 것이다. 

 

“형의 조선은 어떤 곳입니까?”

 

형의 겁은, 무엇입니까? 상혁은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질문을 했다. 원식의 웃음이 조금 씁쓸해졌다. 

 

“여동생이 있습니다.”

 

꽃 피는 계절에 태어난 귀한 아이입니다. 그 아이가, 별 탈 없이 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상혁은 제 홀어머니를 떠올렸고, 원식은 다시 조준경에 눈을 맞추었다.

 

“상황이 절박할수록, 총구에서 눈을 떼면 위험해집니다.”

 

조준경에 담긴 눈에는 연기도 파편도 들어오지 못하니까. 조준경 옆의 금경이 빛을 받아 작게 찬란했다. 수류탄은 쥐고 있을수록 위험합니다. 자멸은 권총으로만. 상혁은 작게 고개를 주억거리고, 옥상 아래로 시선을 옮겼다.

 

“폭탄은, 꼭 터질 것입니다.”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기폭장치가 제대로 도달하지 못하면 모두 물거품 아닙니까?

 

“저 안에서, 곧 조선의 부활이 불타오를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상혁은 작은 폭약을 손에 꾹 쥐었다. 원식은 조준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떨리는 상혁의 어깨를 툭 쳤다. 그 순간 연회장의 밖으로, 스스로 노래하는 봉황의 목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폭약을 던지는 것은 분노에 찬 가슴의 몫인가 봅니다.”

 

저격수의 총을 움직이는 것은 냉정한 머리인데. 원식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고, 순식간에 순사 한 명이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조용히 쓰러졌다. 아직까지 밖은 조용했고, 봉황의 노랫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뜨거운 가슴도, 냉정한 머리도 모든 것이 조선을 위해 손짓하니, 결국은 하나라 할 수 있겠습니다.”

 

상혁이 온 힘을 다해 연회장의 입구에 수류탄을 던졌다. 펑-. 순식간에 순사 서넛이 쓰러졌고, 

 

봉황의 노랫소리가 끊겼다.

 

-

 

연회장을 가득 매운 음률은 그것을 듣는 모든 이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히 아름다웠다. 총독을 비롯한 모든 군인들도, 내부 감시를 맡은 순사들도 일제히 무대를 보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두 번의 기회는 없다. 재환은 신발끈을 고쳐 묶는 척 연회장 구석에 쪼그려 앉아 두 개의 가방을 열었다. 폭약은 이상이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재환이 기폭장치를 확인하려던 그 순간,

 

“커헉-.”

 

“쥐새끼 한 마리가 겁도 없이 잘도 숨어들어 왔구나.”

 

재환의 동태를 수상히 여기던 한 일본군의 곤봉에 재환의 왼쪽 어깨가 부서졌다. 오른손으로 어깨를 그러쥔 재환의 무릎이 꺾이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보던 택운의 눈빛이 흔들렸다. 분명히 왼쪽 어깨를 노렸다. 그렇다면 수 년 전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아는 일본인일 것이었다. 이는 곧 택운의 신변도 안전치 못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혼란스러운 얼굴로 택운이 고개를 들자, 재환을 쓰러뜨린 일본군의 어깨 너머로 세상 더 없이 맑은 목소리로 노래하던 제 연인의 눈빛 또한 갈 곳을 잃은 것이 보였다. 택운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서든 뒤집고 싶었다. 폭약가방을 향해 일본군의 허리가 수그러지는 것이 한없이 느리게 택운의 눈에서 재생되었고, 혼란스러운 와중에 택운의 머릿속에 세 번째 작전이 홍빈의 목소리로 울려 퍼졌다.

 

‘혹, 기폭장치에 문제가 생기거든, 무대 위에서 제일 큰 소리로 노래하는 사람의 심장을 쏘십시오. 그 자의 품에 있는, 또 다른 기폭장치를 터뜨려야 합니다.’

 

그래, 아무리 일본인일지라도 무고한 시민을 다치게 할 작전을 짤 홍빈이 아니었기에 몇 번을 그 자가 누구냐고 물었음에도, 침묵으로만 일관하던 그 단호한 태도를 저는 의심했어야만 했다. 준비를 하는 동안, 의식적으로 저를 피하던 학연을 한 번 안아주지도 못하고 그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만 보아서는 안 되었다. 만약, 한 번이라도 제가 학연을 향해 스스로를 아껴 달라 부탁했다면, 생을 놓으려는 학연의 결심이 조금이라도 흔들렸을까? 택운은 지나간 시간을 돌릴 수 없다면 지금 이 순간이라도 멈춰놓고 싶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학연의 노래는 흘러갔고, 일본군은 느리게 폭약가방을 손에 쥐었다. 더는, 애달플 수 있는 시간조차 없었다. 선택의 여지도 남지 않았다. 택운은 자꾸만 흐려지는 시야에 학연의 얼굴을 담았다. 어렴풋이, 붉은 옷을 입은 학연도 먼 과거의 기억을 쥐고 웃었다. 그 미소에 힘겹게 함께 웃어주던 택운은 떨리는 손으로 제 허벅지에 있는 권총을 그러쥐었다. 학연아, 그대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를, 원망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그대 하나 지킬 용기조차 없는, 미천한 인간으로 네 앞에 나타난 나를 차라리 욕심껏 미워했으면 좋겠다. 학연은 눈을 감았다. 죽음은 작전의 성패와는 관련 없이, 한 편으로는 저의 소망이라고 생각하면서.

 

 

“홍빈군.”

 

저를 개성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제 이야기를 듣고 갑작스레 정신을 잃은 택운의 곁에서 한참을 실성할 것처럼 울던 학연이, 혼절하듯 잠들었다 일어나고 뱉은 첫 마디였다. 운명론자와는 거리가 멀었던 홍빈도 눈앞에서 두 사람의 반응을 보고는 헛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 어둡고 갑갑한 곳을 다시 찾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학연은 파들파들 떨리는 제 주먹을 꼭 다잡아 쥐었다.

 

“제가, 누구인지에 대한 대답이 그 곳에 있을 것입니다.”

 

제 손끝을 타고 들어오던 전생의 기억을, 그 몇 백 년을 따라 내려온 죄책감을, 제가 어떻게든 덜어주고 싶습니다. 

 

“저를 가둔 사람이라 한들, 저를 그 안에서 살게 한 사람이기도 하니까요.”

 

“... 저는 거사가 끝나기 전까지 경성을 떠날 수 없습니다. 원식군에게 부탁해 놓겠습니다.”

 

달칵, 갑작스레 방문이 열리고,

 

“내가, 가겠습니다.”

 

재환이 금방이라도 젖어들 눈으로 말을 이었다. 그의 눈 속에는, 이해할 수 없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전설이 일렁거렸다. 

 

“안 될 일입니다. 형은 연회장 안에 들어가야 하니 저와 함께 준비해야할 일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재환의 눈이 짐짓 단호했다. 홍빈은 그 안에서 알 수 없는 또 하나의 열의를 읽다, 곧 재환의 조국을 발견하고 말았다.

 

“재환형이 가장 총독과 가까이 있어야 하니, 준비할 것이 많습니다.”

 

원식군을 보내야 합니다. 재환이 반박하려는 찰나 홍빈이 뱉은 한 문장이 재환의 입을 틀어막았다.

 

“형이 원하는 조국을, 형의 방식으로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채비를 서두르시지요. 재환의 굳은 주먹과 학연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

 

오래 전에 멸망한 나라의 왕궁이라는 것은, 다른 어떤 곳 보다 더 진득하게 시간의 흐름을 받아낸 듯 그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흐트러지기 마련이었다. 홍빈이 건네 준 지도를 더듬어가며 간신히 전각의 터를 찾아낸 두 사람의 발소리가 창문 하나 없는 어둡고 축축한 지하의 복도를 뒤덮었다. 학연은 낯익은 듯 낯선 공기의 냄새에 어깨를 움츠렸고 원식은 그 뒤를 묵묵히 따라 걸었다. 이윽고 두터운 철문 앞에 먼저 당도한 학연은, 오래 전의 연인이 제 피로 남겨 놓은 글자를 읽으려다 차오르는 눈물을 닦았다. 시간의 흐름이 이리도 잔인했다. 군데군데 지워진 글씨에서 택운의 표정이 비쳤다. 죄책감과도 같이 짙은 갈색이 되어버린 그 낡아빠진 약속을 학연이 조심스레 제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그 순간,

 

鳳鳴朝陽(봉명조양)

 

망국의 왕이 마음을 담아 새긴 넉 자의 염원이 붉게 빛나고, 놀란 눈을 한 학연의 손끝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학연은 철문에서 손을 떼지도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원식이 놀라 학연을 향해 손을 뻗으려던 찰나, 학연의 몸에서 퍼져 나온 뜨거운 광휘가 빈틈없이 지하를 메웠다. 모든 것을 문드러지게 만들 것처럼 눈부시던 불빛이 원식의 몸에도 닿아왔지만, 자신을 해칠 정도로 뜨겁지 않다는 사실에 원식은 급히 빛무리를 헤집고 학연을 찾았다. 곧 원식이 주저앉은 학연의 어깨를 찾아 두 손으로 잡자, 학연으로 비롯된 영원히 타들어갈 것 같던 그 불이 순식간에 철문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하게 멎어버렸다. 괜찮으십니까? 학연을 안아 올리려던 원식의 손을 학연이 밀어내고,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어주십시오.”

 

그에 원식은 아무 말 없이 홍빈에게서 받아온 열쇠로 옥의 문을 열었다. 묵직한 쇠붙이가 긁히는 소리가 울리고, 학연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열흘에 한 송이, 제게 시간의 흐름을 일러주던, 시들어버린 모든 모란송이들이 다시 환하게 피어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의 학연의 몸에 찾아오는, 변화. 학연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희게 변했다. 학연은 예감했다. 봉황에게도, 불사조에게도 어떤 종말은 있었다.

 

“원식군.”

 

저를, 거사에 투입시켜주십시오. 나의 재를, 해방의 거름으로 써 주십시오. 

 

조국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나의 연인을, 홀로 좇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鳳鳴朝陽(봉명조양): ‘봉황(鳳凰)이 산의 동쪽에서 운다.’는 뜻으로, 

천하(天下)가 태평(太平)할 조짐(兆朕), 혹은 뛰어난 행위(行爲)를 칭찬(稱讚)하는 말

 

-

 

나는 너를 따라 어디든 가리

새장 속에 갇혀 노래하던 나를

꺾인 날개 펼쳐 달의 어깨 위를 날게 해

이젠 눈이 멀어도 좋아

 

노래하는 학연의 표정은 기실로, 행복해보였다.

 

내가 숨이 멎어도 좋아

 

느리게 남은 소절을 불러낸 학연은 한없이 떨려오는 제 손끝을 숨기기 위해 옷소매를 쥐고 하늘하늘 팔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택운은 벌벌 떨며 제 왼쪽 가슴 어디쯤을 조준하고 있었다. 학연은 아랫입술을 물어 울음을 참고 있는 택운을 향해 애써 웃었다. 일본군의 손에 가방이 들렸고, 그가 걸어 나가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갈 참이었다. 지체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는 택운의 손끝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학연은 눈을 감았다. 여기까지, 참으로 힘들게 오셨습니다. 

 

춤을 추는 치맛자락인가

나비가 벗고 떠난 허물인가

찰나의 한순간만 아름다운 것

가장 쉽게 시드는 것

 

사랑

 

노래의 마지막 소절이 끝나고,

 

-찰나의 한 순간이었던 아름다움이 나를 여기까지 살게 했으니

이제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시들어

 

나의 조선과 함께.

 

학연은 말갛게 웃었다.

 

과거의 그리움이자, 미래의 그림이었던 당신과-

 

타앙-! 한 발의 총성이 연회장을 뒤엎었다.

 

나는 재가 된다.

 

차가운 금속이 들이받힌 학연의 아랫배에서 단 하나의 불길이 시작되었고 

 

일천구백사십오 년 일 월, 폭발음과 함께 저마다의 해방이 시작되었다.

 

End.

 

 

누가 그를 하찮은 형이라 했는가. by. 익명
Salvatio by. D. 에르타
꽃잎놀이 by. 허브
사랑의 죽음 by. 춘몽
소년과 소년의 청춘 by. 청
Our Happy Ending by. 창문
힐링이 필요해 by. 징어
Nostalgia (노스텔지아) by. 이든
인어소년 by. 몽환의 오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by. 멜렛
One Step Closer to Blossom by. 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