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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 일어났어요?”

 “아침부터 왜 이리 소란이야.”

 “너무 추운 것 같아요.”

 “혁이한테 장작 때라고 할게.”

 

 

 

 산속 깊은 곳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저택은 조금 더 일찍 겨울이 찾아왔다. 계절에 둔감한 이 집 식구들은 겨울이 온 지도 모르는 걸까. 중얼거리는 학연의 코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으, 추워. 살을 에는 듯한 냉기에 팔을 매만지는 손 역시 빨갛게 얼어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학연은 이 저택에서 그나마 가장 따뜻한 곳인 응접실로 향했다. 오래된 벽난로가 있는 응접실은 학연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장작을 들고 학연의 뒤를 따라온 혁은 늘 그렇듯 살갑게 말을 건넸다.

 

 

 

 “많이 추워요, 형?”

 “응. 진짜 추워. 사람 다 얼어 죽겠어.”

 “에이. 이 집에 사람은 형밖에 없는 거 알면서.”

 “너랑 너네 형은 추위도 못 느껴?”

 “네.”

 “그럼 긴 옷은 왜 입어?”

 “뱀파이어들도 패션 감각이란 게 있거든요.”

 

 

 

 실없는 농담에 픽하니 웃음이 나왔다. 가끔씩 망각하는 사실을 되새기니 불현듯 소름이 돋았다. 생각해보면 저는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뱀파이어 소굴에 갇혀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뱀파이어들만 존재하는 이곳에서 지낸지 어언 6개월이 지나는 시점에 새삼 놀라운 감정이 피어났다.

 

 

 상혁은 이 집에 사는 뱀파이어 중 가장 어린 뱀파이어였다. -뭐, 이 집에 사는 뱀파이어라고 해봤자 레오와 상혁이 다였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살갑게 말을 걸어오던 상혁은 꼭 막냇동생 같은 느낌이었다. 이름은 상혁인데, 편하게 혁이라고 불러주세요! 레오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상혁 덕에 학연은 조금 수월하게 이 집에 적응할 수 있었다.

 

 

 

 “오늘 아침은 뭐 먹고 싶어요?”

 “딱히 안 먹고 싶은데?”

 “레오 형이 형 꼭 챙겨 먹이래요.”

 “레오도 잘 안 챙겨 먹잖아.”

 “우린 하루 한 끼 안 먹는다고 죽진 않아요.”

 “나도 마찬가지야.”

 

 

 

 투닥투닥 상혁과 가벼운 언쟁을 벌였다. 아 몰라, 형 무조건 먹어야 해요. 순진하게 생긴 얼굴과는 상반되는 힘을 이길 수가 없다. 거의 끌려가듯 주방으로 향하는 학연의 발걸음이 상혁에게 맞추기 위해 빨라졌다.

 

 

 식탁에 홀로 우두커니 앉아있는 레오는 이미 식사를 시작한 지 꽤 된 것 같았다. 혼자 먹으면 외로울 텐데. 시답잖은 걱정은 마음속에 고이 넣어둔 채 레오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런저런 음식들이 놓여있는 제 앞과 달리 레오의 앞은 간소했다.

 

 

 

 “나만 사치스럽게 먹는 것 같아요.”

 “너만 이 집에서 음식을 먹으니까.”

 “피만 먹으면 안 질려요?”

 “이거 말곤 먹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선택권이 없지.”

 “오늘은 무슨 피예요?”

 “돼지. 네 앞에 놓여있는 고기 있지? 그 친구 거야.”

 

 

 

 으- 괜한 걸 들었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던 학연은 잡생각을 지우기 위해 재빨리 숟가락을 들었다. 식기들끼리 부딪혀 만들어 내는 소음이 나쁘지 않았다. 이것 저것 집어먹는 학연을 바라보는 레오의 손엔 와인잔 하나만이 들려있었다.

 

 

 

 “왜 굳이 와인 잔에다 따라 마셔요?”

 “팩에 들어있는 거 먹으면 너무 야만스러워 보여서.”

 “어쨌든 먹는 거면서…”

 “뱀파이어들도 기분이란 게 있으니까.”

 

 

 

 붉고 찐득한 액체가 레오의 입가를 적셨다. 순간 풍기는 역한 피비린내에 저도 모르게 헛구역질을 한 학연은 뒤늦게 레오의 눈치를 살폈다. 미안해요. 이건 진짜 적응이 안 돼요. 학연의 말에 레오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 나도 처음에 그랬어.”

 “얼마나 됐어요?”

 “뭐가?”

 “뱀파이어 된 지.”

 “얼마 안 됐어. 한 2백 년 정도?”

 “와 2백 년이 얼마 안 된 거구나. 그럼 혁이는요?”

 “혁이는 백 년 좀 안 됐어. 아직 애지. 인간으로 치면… 열일곱 정도?”

 

 

 

 저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월의 길이가 오늘따라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듣자 하니 뱀파이어는 영생의 삶을 산다고 했다. 그런 사람들에게 백 년은 그저 지나가는 시간 중 하나겠지. 그에 비해 80년 정도로 유한 되어있는 제 삶은 이들의 삶에 비해 굉장히 보잘것없게 느껴졌다.

 

 

 

 “어때요, 영생의 삶은?”

 “좋지도 싫지도 않아.”

 “나였으면 싫을 것 같아요. 주변 사람들 다 떠나고 나만 남는다고 생각하면 좀 외로운 것 같아요.”

 “그래서 난 삶이 유한 되어있는 인간과는 어울리지 않아. 그런 존재들을 만나고 나면 후회는 온전히 내 몫이거든.”

 “그럼 내가 레오의 첫 인간이에요?”

 “…응. 내 생에 첫 인간은 차학연 너야.”

 

 

 

 말을 잇기까지의 짧지 않은 텀은 모른 척하기로 한다. 인정받은 기분에 붕 뜬 마음은 가라앉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쿵쾅쿵쾅 온몸을 잠식한 기분 좋은 울림에 학연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아, 레오는 왜 이름이 레오예요?”

 “무슨 말이야?”

 “그냥, 보통 이름은 성과 이름을 합치는 거잖아요. 차, 학연 이렇게. 근데 레오는 성도 없고… 아 혹시 혼혈이에요? 한국 국적이 아닌가?”

 “이제 국적 같은 건 상관없지. 나는 그냥 뱀파이어일 뿐이니까. …이름은 누가 지어줬어. 내 이름이 꼭 레오였음 좋겠대.”

 “그게 뭐예요.”

 “그러게 그게 뭘까.”

 

 

 

 하여튼 영문을 모를 말들 투성이다.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던 학연은 이내 식사에 집중했다. 그런 학연에게 레오의 진득한 시선이 붙었다. 그 날카로운 눈으로 학연을 바라보는 게 여간 간지러운 게 아니었다. 학연은 짐짓 모른 체 하곤 레오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저 애타게 바라보는 건 레오의 몫이었다.

 

 

 내가 레오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학연이 듣지 못할 정도로 조용히 중얼거리던 레오는 이내 학연에게 집중하던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붉어진 학연의 뺨은 보지 못한 채.

 

 

 

*** 

 

 

 

 “혁아,”

 “네.”

 “차학연 이불 좀 바꿔줘. 감기 걸리겠더라.”

 “형 진짜 이상해요.”

 “뭐가?”

 “남 일엔 관심이라고는 일절 없었으면서 왜 갑자기 그래요?”

 

 

 상혁의 말마따나 레오는 늘 자신밖에 모르던 이였다. 더 나아가봤자 상혁을 비롯한 얼마 남지 않은 뱀파이어 개체들에게만 신경 쓰던 레오가 달라졌다. 글쎄, 의미 모를 대답에 상혁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리고, 언제까지 이 집에 놔둘 거예요?”

 “그것도 글쎄.”

 “우리뿐만 아니라 학연이 형도 위험해질 수 있다구요.”

 “알고 있어. 그래서 우리 모두가 안전할 방법을 찾는 중이고.”

 “도대체 왜 학연이 형을 싸고도는 거예요?”

 “예쁘잖아.”

 

 

 

 의중을 숨기기 위해 뱉는 말의 밑바탕은 진심이었다. 애초에 정상적인 대답을 원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허망한 대답을 들으니 헛웃음만 나왔다. 하여간에 몇십 년을 봤지만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무튼, 하루빨리 집에서 인간은 좀 내보내요. 볼 때마다 목덜미 밖에 안 보여서 미칠 것 같으니까.”

 “야만적인 짓은 넣어둬. 영생의 삶을 당장 내일이라도 끝내고 싶은 게 아니면.”

 “…….”

 “알잖아. 네 충동적인 흡혈이 그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조용하지만 뼈가 있는 일침에 상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나가봐. 레오의 말에도 상혁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또, 왜. 신경질적인 말이 들리고서야 상혁은 발걸음을 돌렸다. 쉬어요. 그 말을 끝으로 육중한 문이 닫혔다.

 

 

 

*** 

 

 

 

 

 학연이 이 저택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거실 한 가운데에 있는 오래된 피아노였다. 처음 이 저택에 들어왔을 때부터 가장 눈에 띄던 피아노는 아주 오랫동안 연주되지 않았다고 상혁이 말했다. 좋아 보이는데 왜? 학연의 말에도 상혁은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주인이 따로 있대요.’

 ‘주인? 레오?’

 ‘아뇨. 제가 오기 전에 이 집에 살았다던데…’

 ‘뱀파이어? 인간?’

 ‘그건 저도 잘 몰라요. 워낙 형이 자기 얘기를 안 하는 사람이라.’

 

 

 

 문득 생각난 것들에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저보다 먼저 레오의 곁을 지켰던 사람이 있다니. 저는 알 수 없는 레오의 과거가 궁금해짐과 동시에 서러움이 밀려왔다. 괜한 심술에 피아노 앞에 앉아 뚱당 거리고 있으니 익숙한 냉기가 학연을 감쌌다.

 

 

 

 “피아노, 칠 줄 알아?”

 “비행기는 칠 줄 알아요.”

 “그게 뭐야?”

 

 

 

 정말 모른다는 듯한 레오의 얼굴에 자신감이 붙은 학연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천천히 건반을 짚어갔다. 미, 레, 도, 레 순으로 차분히 건반을 눌러가던 학연은 연주를 끝마치고선 뿌듯한 얼굴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멋진데?”

 “정말요?”

 “응.”

 “이번엔 레오가 쳐주면 안 돼요?”

 “난 딱 한 곡만 칠 줄 알아. 피아노 주인이 그것만 가르쳤거든.”

 

 

 

 길고 흰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 위에 올려져 있으니 그림이 따로 없었다. 긴장이 된 건지 심호흡을 하던 레오는 이내 연주를 시작했다. 천천히 건반을 짚어가는 손길이 유려했다. 부드러운 선율에 마음이 동했다. 그리고 이내 시선은 피아노가 아닌 그것을 연주하는 레오의 얼굴로 향했다.

 

 

 늘 무표정에 가깝던 레오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 스민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힘 있지만 그와 다르게 매끈하게 연주되는 곡에 꼭 혼을 빼앗길 것 같단 생각을 했다. 한참을 레오의 얼굴만 들여다보니 이미 곡은 끝난 상태였다.

 

 

 

 “실력이 좀 녹슬었지? 너무 오랜만이라서. 피아노도 중간중간 조율을 하긴 했는데 역시 좀 안 맞네.”

 “아뇨. 너무 멋있었어요. 곡 이름이 뭐예요?”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학연은 순간 이 곡이 자신을 위한 발라드 같단 생각을 했다. 자신만을 위한 연주가 마음에 박혀 빠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쿵-쿵- 북소리처럼 울리는 심장 소리가 레오에게까지 들릴 것 같았다. 아, 그, 오늘 연주 고마워요. 허둥지둥 제 방으로 몸을 숨기는 학연을 바라보는 레오의 시선이 진득했다.

 

 

 

*** 

 

 

 

 그러니까, 이상한 감정이었다. 학연은 이 모든 것들이 적응되질 않았다. 레오만 보면 쿵쿵 뛰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낯선 감정에 결국 선택한 건 한심하게도 레오를 피하는 행동들이었다. 레오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아침도 거른 채 방에만 틀어박혀 있다 레오가 방으로 들어가면 그제야 점심 식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을 피해 다녔는데도 저를 찾지 않는 레오의 모습에 울컥 서운함이 밀려왔다. 모순이었다. 실컷 피해놓고 바라는 게 관심이라니. 학연은 따로 노는 제 생각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가끔 방에 틀어박혀 있으면 레오의 피아노 연주 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여전히 똑같은 곡이었고, 학연의 마음 역시 똑같이 반응했다. 한참을 이불 속에 파묻혀있던 학연은 정갈한 노크 소리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학연, 밥 안 먹어?”

 “네. 생각 없어요.”

 “혁이한테 말해둘 테니 언제든지 배고프면 차려 달라 해.”

 “네.”

 

 

 다정함을 이기지 못한 제 마음이 파편처럼 발밑을 나뒹굴었다.

 

 

 

 

 

 “형.”

 “응.”

 “형 학연이 형 좋아해요?”

 “…왜?”

 “왜 이렇게 못 챙겨서 안달이에요? 인간은 하루 밥 안 먹어도 안 죽어요.”

 “말랐잖아.”

 “그니까 그건 형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니까요!”

 

 

 

 빽 소리를 지른 혁은 아차 하는 마음에 학연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굳게 닫힌 문 뒤로 들렸을까. 생각을 채 마치기도 전에 레오는 상혁의 손을 잡아끌었다. 학연이 들으면 안 되는 내용인가 싶어 조용히 뒤따른 상혁의 발걸음이 다급했다.

 

 

 

 “차학연이 싫어?”

 “그건 아니지만… 위험해진다구요. 우리의 존재가 밝혀지는 순간 우린 끝장이에요.”

 “혁아,”

 “우리만 위험해질까요? 학연이 형은 생각 안 해봤어요? 어쩌면 우리보다 더 위험해질 사람이 형이에요.”

 “차학연이 여기서 지낸 지 벌써 6개월이야. 그동안 무슨 일 있었어? 없었잖아.”

 “함부로 안심했다간…”

 “네 말 무슨 말인지 알아. 기다려줘.”

 

 

 

 애원에 가까운 부탁에 상혁은 입을 꾹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 

 

 

 

 달빛이 최고조에 달하는 깊은 새벽, 학연의 방에선 간헐적인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악몽이라도 꾸는 건지 식은땀까지 흘려가며 꿈과 현실의 사이에서 발버둥을 쳤다. 분명 아는데, 꿈인 걸 알고 있는데.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덜컥 공포감이 밀려왔다. 끝없이 펼쳐지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정신을 놓을 무렵, 저의 손을 잡아끄는 존재가 있었다.

 

 

 

 “괜찮아, 쉬이-”

 “흐윽, 레오…”

 “울지 마. 내가 왔어. 괜찮아.”

 

 

 

 헐떡이는 숨을 주체 못 한 학연의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익숙했다. 괜찮아. 이제 정말 괜찮아 따위의 말로 위로를 건넸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안정을 되찾은 학연을 놓아주는 손길이 아쉬웠다.

 

 

 

 “원래 이렇게 악몽을 많이 꿔?”

 “…밤잠을 설치긴 하는데 악몽은 이번이 두 번째예요.”

 “왜 말 안 했어?”

 “민폐 끼치는 것 같아서…”

 

 

 

 학연의 말에 레오는 무어라 답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늦었어, 다시 자자. 이불을 끌어 학연의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 눈을 깜빡이며 저를 바라보는 학연의 눈 주위를 슬며시 쓸어 감겨준 레오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학연을 토닥여주었다.

 

 

 당신의 다정함은 사람을 홀리게 해.

 

 

 

 

 그 날부터 학연의 잠자리를 봐주는 건 온전히 레오의 몫이 되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학연이 되었다 손사래를 쳤지만, 레오는 의견을 묵살한 채 밤마다 학연의 방을 찾아왔다. 머리맡에 놓인 의자에 앉아 학연이 잠들 때까지 토닥이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인간이 참으로 간사한 게 그렇게 부끄러워했으면서도 레오의 손길이면 밤새 잠 한 번 깨지 않고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학연은 이젠 레오가 없으면 잠을 못 잘 지경에 이르렀다. 차가운 손이 닿는데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열이 오른 얼굴을 식혀주려는 듯 차분하게 쓸어내리는 손길을 느끼다 보면 어느새 학연은 깊은 잠에 들어 있었다. 한참을 얼굴을 매만지던 레오의 회색빛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가 이내 다시 가라앉았다. …미안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레오는 곧바로 등을 돌렸다.

 

 

 

*** 

 

 

 

 저택의 모든 방은 학연을 위한 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학연에게 개방적인데 유일하게 그렇지 못한 방이 있었다. 다섯 개의 방을 모두 들어가 본 1층과 달리 2층은 제 방을 제외한 두 개의 방 모두 미지의 공간이었다.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 레오와 한 약속 때문에 쉬이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저 맴돌 뿐이었다.

 

 

 학연은 레오의 방과 연결된 서재가 궁금했다. 상혁도 잘 모르는 공간인 그곳에 가면 제가 없던 시간의 레오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복도엔 문이 없는 그 서재에 들어가려면 무조건 레오의 방을 지나쳐야 하는데 레오는 제 방문을 열어줄 생각이 없었다.

 

 

 

 ‘이 집 어디든 들어가도 좋아. 근데 내 방에만 들어오지 마.’

 ‘…레오 방이요?’

 ‘응. 아, 아니다. 내 방까진 들어와도 좋아. 근데 내 방이랑 이어져 있는 서재에만 들어가지 마. 이게 네가 이 집에 사는 조건이야.’

 

 

 

 그 회색 눈동자가 주는 무게감에 학연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호기심의 동물인 인간에게 약속은 기폭제 같은 존재로 작용하기 마련이었다. 레오와 학연의 사이가 가까워지기 시작하며 학연은 레오의 방에 발을 들였다. 짙은 고동색의 가구들로 이루어져 있는 레오의 방과 이어져 있는 서재는 큰 문으로 가리어져 있었다. 레오는 가끔 학연이 서재 쪽으로 시선을 던질 때마다 어떻게 알아채는 건지 학연의 얼굴을 잡아 제 시선을 맞추곤 했다.

 

 

 

 ‘네가 저곳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면, 나는 너를 내칠 수밖에 없어.’

 

 

 

 레오의 입을 통해 나온 말에 학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쿵 하니 떨어졌다. 내쳐지고 싶지 않아. 그 생각만이 학연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예나 지금이나 미움받는 건 딱 질색이다. 더구나 그 상대가 레오라면.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리다. 결국 학연은 눈을 감고 레오의 품에 안기기를 택했다. 순간의 호기심으로 행복한 일상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학연은 의식적으로 그 방문을 외면하려 애썼고, 말미에는 아예 레오의 방 근처도 가지 않았다. 그런 학연을 볼 때마다 기특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레오였다.

 

 

 가만히 침대에 누워있으니 이제는 익숙해진 선율이 문틈을 파고들었다. 레오의 연주는 다른 이의 연주보다 더 깊은 무언가가 있다고 학연은 생각했다. 무언가가 이끄는 것처럼, 또는 홀린 것처럼 밖으로 나간 학연은 피아노 옆에 기대어 레오의 연주를 감상했다.

 

 

 

 “…언제 왔어?”

 “연주 시작하자마자요.”

 “이 곡 지겹지 않아?”

 “아니, 전혀요. 난 레오가 피아노 치는 게 너무 좋아요. 반할 것 같아.”

 

 

 

 은근슬쩍 농담처럼 내뱉은 진심을 알아챘을까. 말을 내뱉은 학연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살며시 지은 미소가 무색하게도 레오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레오? 한 번 더 저를 부르는 학연의 목소리에도 레오는 꼼짝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피아노 앞에 앉아있던 레오는 쉬라는 짧은 말을 끝으로 2층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런 레오의 반응에 학연은 당연하게도 상처를 받았다. 제 마음이 짓밟힌 것 같은 상황에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나? 아니라면 왜 나에게 연주를 해주고 밤마다 나를… 설렘에 부풀어있던 마음이 펑 하고 터져버렸다. 섣부른 기대는 역시 독이었다.

 

 

 서러운 마음을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어서 결국 혼자 속으로 삭혀야 했다. 무거운 것들을 달랠 길이 없어 이른 오후부터 잠을 청해보았지만 역시 레오가 없으니 깊이 잠에 들지 못했다, 학연은. 반쯤 깨어있는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았고 낯선 상황에 뒤척이려는 순간, 언제 들어온 건지 차가운 손이 학연의 얼굴을 쓸었다.

 

 

 

 “푹 자.”

 

 

 

 약간은 쇳소리 같다고 생각한 레오의 목소리는 꼭 마법 같았다. 슬슬 밀려오는 잠이 학연을 잠식하기 직전,

 

 

 

 “…나쁘다, 진짜.”

 

 

 

 그 한마디만을 남기고 학연은 깊은 잠에 빠졌다.

 

 

 

*** 

 

 

 

 필요치 않은 다정함은 독이다, 라고 학연은 생각했다. 여전히 밤마다 조용히 들어와 제 잠자리를 봐주는 레오를 볼 때마다 못된 맘이 튀어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누르고 있었다. 차가운 손이 제 볼을 쓸어내릴 때마다 쿵쿵거리는 심장이 야속했다.

 

 

 레오는 더 이상 피아노 연주를 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학연의 말을 의식해서 하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들을 누구보다 빠르게 눈치챈 사람 역시 학연이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서운함과 서러움을 감당할 수 없었다.

 

 

 

 “형, 무슨 일 있어요?”

 “…일은 무슨.”

 “얼굴 보니까 완전 무슨 일 있는데? 레오 형이랑 싸웠어요?”

 

 

 

 레오의 이름이 나옴과 동시에 어두워지는 학연의 낯빛을 보며 상혁은 이 모든 일의 근원이 레오임을 알 수 있었다. 형, 상혁이 다시 한번 말을 건네자 학연은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말을 말아달란 무언의 행동에 결국 상혁은 눈감아 주기로 마음먹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마음 쓰지 마요.”

 “…….”

 “쉬어요. 오늘 형 늦는다고 했어요.”

 

 

 

 상혁의 말에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인 학연은 힘이 잔뜩 빠진 채 걸었다. 금방이라도 엎어질 것처럼 위태로운 학연은 받으려던 상혁은 이내 내치는 학연에 손길을 거둔다. 괜찮아. 너도 들어가서 쉬어. 그 말을 끝으로 학연은 제 방에 몸을 숨겼다.

 

 

 

 

 레오가 없는 밤은 길었다. 늦는다더니 제 잠자리를 봐주지 못할 정도였던 건지 학연의 방을 찾지 않았다. 빌어먹게도 익숙해지지 못하는 공허함에 몸부림치던 학연은 간신히 지독한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꿈에서 깨어서도 한참을 멍하게 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억겁의 시간을 보내던 학연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레오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확인을 해야 했다. 그가 정말 나에게서 마음이 떠난 건지, 아니 애초부터 떠날 마음이 없었던 건지. 다시… 피아노를 연주할 마음은 없는 건지.

 

 

 두어 번 노크를 하고 방문을 열어젖히니 익숙한 가구들이 눈에 띄었다. …레오. 다 죽어가는 목소리를 쥐어짜 부른 이는 답이 없었다. 고요한 방은 저벅 이는 학연의 발소리만이 전부였다. 고동색의 가구들을 지나 큰 문에 가리어진 그곳, 레오가 경고했던 그곳. 멍하니 시선을 주던 학연은 힘을 주어 큰 문을 밀었다. 예상외로 쉬이 열리는 그 문 너머론 학연이 예상치 못한 광경들이 펼쳐졌다.

 

 

 

 “…이게, 이게 무슨…”

 

 

 

 안으로 들어서자 보인 건 서재 곳곳에 걸린 액자들이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액자는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큰 액자였다. 액자 속 인물과 눈을 마주한 학연은 헛숨을 들이켰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사진 속 주인공은 보라색 머리를 하고, 레오와 똑같은 회색 눈동자를 지닌… 학연 자신이었다.

 

 

 

 내가 저런 사진을 찍은 적이 있던가? 아니 그 전에 저런 머리를 한 적이 있던가? 제 기억엔 없는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걸려있는 걸 보자 머리가 복잡해졌다. 레오는 어떻게 나도 없는 사진을… 이 사진 때문에 이 방에 못 들어오게 한 걸까.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점차 피어오르는 두려움에 뒷걸음질 치던 학연은 이내 무언가에 턱 하니 부딪혀 발걸음을 멈췄다. 학연은 본능적으로 그게 레오임을 직감했다.

 

 

 

 “차학연,”

 “…….”

 “내가 분명 말했지.”

 

 

 

 생전 들어본 적 없는 차가운 목소리임에도 학연은 꿈쩍하지 않았다. 이미 눈의 초점은 나간 지 오래였고 머릿속은 과부하가 되어 터지기 식전이었다. 레오. 먼젓번의 목소리보다 더 식은 목소리로 부르는 제 이름이 낯설었다, 레오는.

 

 

 

 “…미안해요. 약속을 어겼어요.”

 “…….” 

 “나 들어야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요.”

 “해줄 말이 없는데.”

 “레오.”

 “…뱀파이어의 흡혈은 가장 무거웠던 생을 떠올리게 하지. 그 기억만이라도 내가 없었으면 좋겠다.”

 

 

 

 날카로운 레오의 송곳니가 학연의 목덜미를 물었다. 뜨거운 입김이 닿음과 동시에 살갗이 뚫리는 느낌이 생경했다. 하읏,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낸 학연은 무언가 몸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에 그만 다리 힘이 풀려 주저앉아버렸다. 늘 차분하던 레오의 회색 눈동자는 피로 일렁이는 것마냥 붉게 변해있었다.

 

 

 

 “이게 나야. 남의 피를 빨아먹고선 최악의 기억을 되살리는 더럽고 추잡한 존재.”

 “…….”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는 손길이 거칠었다. 이미 레오의 입가는 학연의 피가 덕지덕지 묻어 엉망이었다. 한 뼘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서 있는 레오의 시선이 진득했고, 그와 동시에 제 머릿속을 치고 들어오는 낯선 장면들에 마음이 무거웠다.

 

 

 무언가 건네야 할 말이 있었다. 해야 하는 말이 있는데 꽉 막힌 울음을 뚫을 수가 없다. …레오. 뒷말은 잇지 못한 채 하염없이 부른 레오라는 그 이름이 학연을 짓눌렀다.

 

 

 

 “…레오,”

 “…그래.”

 “그렇게 많은 짐을 얹어줬는데 왜 다시 나를 만났어요.”

 “…….”

 “다 떨쳐내고 보란 듯이 살았어야죠.”

 “…….”

 “…그랬어야지, 택운아.”

 

 

 

 결국 학연은 레오, 아니 택운의 옷깃을 부여잡고 엉엉 울었다. 길을 잃은 아이처럼 정처 없이 눈물만 쏟아내는 학연을 내려다보는 택운의 얼굴은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뒤엉켜있었다. 결국 학연의 최악은 저인 셈이었다. 여린 연인의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들의 무게가 무거웠다. 학연이 과거 저에게 얹어주었던 모든 것들을 도로 거두어갔다.

 

 

 

***

 

 

 

 택운의 평생을 괴롭게 만든 그 날은 비가 내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우중충하게 낀 구름 덕에 해는 가리어진 지 오래고, 시커먼 어둠이 하늘을 잠식했던 날이었다.

 

 

 그래, 그 모든 일은 차학연을 살리기 위한 일이었다. 이기적인 말이었지만 그 한 마디가 택운을 간신히 살게 했다. 눈을 감으면 그날의 일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억겁의 시간을 보내도 절대 잊을 수 없던 날. 영생의 삶을 사는 뱀파이어였지만 동족의 공격엔 힘 하나 쓰지 못하고 죽어가던 차학연의 모습이 택운을 지배했다.

 

 

 

 ‘택운아…’

 ‘하자, 학연아. 일단 살고 보자. 응?’

 ‘나 못 그래… 내가 어떻게 너한테 그래.’

 ‘괜찮아. 나 괜찮아. 그러니까 제발…’

 

 

 

 뱀파이어와의 흡혈은 전생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했고, 관계는 영혼을 바뀌게 했다. 단순히 영혼이 바뀌는 게 아닌 종족의 혼이 바뀌는 행위는 상당히 위험했고, 따라서 모든 이들이 기피하는 일이었다. 그런 일을 하겠다고 자초한 택운의 표정이 결연했다.

 

 

 

 ‘인간이 되면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그래. 너 외로움 많이 타잖아.’

 ‘너는…’

 ‘난 원래부터 혼자 있는 거 좋아했는데, 뭘.’ 

 

 

 

 익숙하게 학연을 달래며 부드러운 행위를 이어갔다. 제 욕구보다 학연의 처음을 걱정하는 마음이 더 커서 거세게 움직이지 못했지만 택운은 그마저도 좋았다.

 

 

 빗소리를 배경으로 맺은 관계가 끝을 보일 무렵 결국 학연은 한 번 더 울음을 터트렸다. 아파? 택운의 물음에도 그저 고개만 붕붕 저으며 울음을 삼킬 뿐이었다. 다정한 손길로 머리를 쓸어 넘기는 택운의 얼굴을 부여잡은 학연은 그대로 제 얼굴 쪽으로 이끌었다. 집어삼킬 듯한 키스를 퍼부은 학연은 순간 제 안으로 퍼지는 뜨뜻한 느낌에 헛숨을 들이켰다.

 

 

 

 ‘…끝났다.’

 ‘운아… 택운아…’

 ‘응. 나 여기 있어. 왜 자꾸 울어.’

 

 

 

 이내 학연의 안에서 빠져나온 택운은 뒤처리를 위해 따뜻한 물에 수건을 적셔왔다. 꼼꼼하게 학연을 닦아주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이제… 이것도 마지막이겠지. 순간 들어차는 공허함에 택운은 쓴웃음을 삼켰다. 혹여 추울까 재빠르게 옷까지 입혀준 택운은 학연을 안아 들어 제 방으로 향했다.

 

 

 

 ‘네 방은 너무 더러워서 누울 수가 없을 것 같아서.’

 ‘…….’

 ‘학연아, 너 눈 색깔 변했다.’

 ‘…너도, 택운아.’

 

 

 

 회색의 눈동자를 지니고 있던 학연의 눈동자는 따뜻한 다갈색으로 변해있었다. 잘 어울려. 택운의 말에도 학연은 아무 말이 없었다. 택운의 품에 안겨있는 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겨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목소리 안 들려줄 거야?’

 ‘…….’

 ‘학연아-’

 ‘너 눈이 회색이 됐어… 그렇게 돼버렸어.’

 ‘잘 어울려?’ 

 ‘응. 너무 잘 어울려. 그래서 슬퍼.’

 

 

 

 희고 매끈한 피부와 택운의 회색 눈동자가 참 잘 어울린단 생각을 했다. 긴 손가락이 얼굴을 쓰다듬었고 다정한 눈 역시 학연의 시선을 쫓았다. 그렇게 오래도록 말없이 서로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이것도 마지막이겠지. 영원할 거라 믿었던 우리의 밤도, 너와의 관계도.

 

 

 

 ‘나 궁금한 게 있어. 뱀파이어는 뭐야?’

 ‘뱀파이어는 뱀파이어야. 어떤 것도 아닌 그저 그 자체의 뱀파이어.’

 ‘그렇구나.’

 

 

 

 

 택운의 물음에 학연은 금세 또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평생 몰라도 될 감정이었을 텐데. 또다시 피어오르는 자괴감에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또 울려고 한다. 너 처음 만났을 때도 딱 이 표정이었는데. 산에서 조난당한 날 데리고 온 켄한테 뭐라 그랬더라? 살려내고 바로 갖다 버리라 그랬었나?’ 

 ‘결국은 안 버렸잖아. 밥도 잘 먹이고 간호도 잘하고.’ 

 ‘맞아. 그래서 지금 살았지. 그거 생각나? 너랑 키스하다 딱 걸려서 켄 완전 화났던 거.’

 ‘그래서 켄 집 나갔잖아.’

 ‘덕분에 난 좋았어. 걔 맘에 안 들었거든. 널 보는 눈빛이 너무 음흉했어.’

 ‘너만 했겠어?’

 

 

 

 오래전 저택을 떠난 이의 이야기까지 꺼내며 학연을 달래는 택운의 품이 따뜻하다 느낄 무렵, 어스름한 빛이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이별의 시간을 직감한 택운은 힘을 주어 학연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많은 것들을 기억하는데… 내가 다시 태어나면 모든 걸 다 잊어버리겠지?’

 ‘연아,’

 ‘나중에라도 우연히, 아주 우연히 내가 이 대화들을 떠올릴 수 있을까?’

 

 

 

 택운은 대답하지 못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쉬이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긍정의 대답도, 부정의 대답도 둘에겐 긴 기다림이 될 터였다. 빤히 택운을 바라보던 학연은 따뜻해서 익숙하지 못한 손을 들어 택운의 얼굴을 쓸었다.

 

 

 

 ‘내가 너에게 가르친 피아노곡을 듣거나, 뱀파이어가 나오는 책을 읽는다거나, 아니면 너를 닮은 사람을 본다면, 너를 기억할 수 있을까?’

 ‘기억하지 않아도 돼.’

 ‘…….’

 ‘내가 다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피아노를 가르쳐 주던 너도, 좋은 향이 나던 너도, 이렇게 다정한 키스를 하던 우리도.’

 

 

 

 이제 더 이상 따뜻하지 않은 입술이 학연의 입술에 닿았다. 가볍게 쪽 소리를 내며 떨어진 입술이 못내 아쉽단 생각이 들었다.

 

 

 

 ‘기억하는 게 네 몫이면 나는 뭘 하면 될까, 택운아.’

 ‘…….’

 ‘너만 날 기억하면 긴 시간 동안 많이 공허할 거야. 외로울 거야.’

 ‘…다음 생에서도 나를 사랑해줘.’

 ‘…….’ 

 ‘지금보다 더 많이 사랑해주겠다 약속해줘. 난 그거면 돼. 그 약속이면 얼마든지 너를 기다릴 수 있어.’

 

 

 

 약속할게. 어디서 어떻게 만나도 너를 사랑할 거야. 너만 사랑할 거야. 학연의 말에 택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택운의 말이 채 닿기도 전에 학연의 눈이 감겨왔다.

 

 

 

 ‘택운아, 나 졸려…’

 ‘…이제 잠들 시간인가보다.’

 ‘금방 올게. 조금만 기다려줘.’

 ‘천천히 와도 돼. 오기만 해.’ 

 ‘…사랑해.’

 

 

 

 오랜 잠을 자기 위해 학연의 눈이 감겼다. 답지 않게 가벼이 감기는 눈은 편안해보였다. 비로소 학연이 눈을 다 감고서야 택운의 눈에선 눈물이 떨어졌다. 다시 만나자. 꼭 그러자. 주인 없는 말들이 방안을 가득 채웠고 택운은 학연을 붙잡고 엉엉 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연은 소멸의 상태에 이르렀다. 불꽃이 일 듯이 서서히 타오르며 소멸되는 그 모습에 택운은 또 한 번 목 놓아 오열했다. 애초부터 없던 사람인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학연의 빈자리가 컸다.

 

 

 꼭 다시 만나자. 언젠가 다시 만나자. 지금보다 더 좋은 날, 조금 더 행복한 그런 날에.

 

 

 널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다.

 

 

 

*** 

 

 

 

 기나긴 회상을 끝마친 결말은 제 눈앞의 학연이었다. 예전과 같은 그 눈을 하고선 저를 바라보는 모습에 견딜 수가 없었다. 과거와 달리 따뜻한 그 얼굴과 다갈색의 눈동자가 마음에 박혔다.

 

 

 

 “돌아왔어.”

 “…….”

 “너무 늦게 기억했지만… 그래도 나 왔어.”

 “…….”

 “많이 기다렸지, 택운아.”

 

 

 

 택운이 띄엄띄엄 말을 잇던 학연을 끌어안는 건 순식간이었다. 한순간도 잊어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저를 기억하지 못해 빈 껍데기 같았던 사람이 다시금 저로 채워졌다. 따뜻한 품에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기다렸어.”

 “…….”

 “매일매일 네가 가르쳐준 피아노를 치고, 네가 알려준 책들을 읽고… 너의 흔적만 찾으면서 살았어.”

 

 

 

 아이처럼 학연의 품을 파고드는 택운을 토닥이는 손길이 마냥 좋았다. 모든 게 제 자리를 찾은 것마냥 평화로운 것들에 그제야 호흡이 안정되어 갔다. 부여잡은 얼굴을 잡아당겨 제 얼굴과 가까이하니 택운의 시선엔 온통 학연뿐이었다.

 

 

 

 “이젠 어디 안 가.”

 “응. 안 보내. 안 보낼 거야.”

 “오래오래 네 옆에 있을 게.”

 “…….”

 “…사랑해, 택운아.”

 

 

 

 오랫동안 너를 그리던 나에게 돌아온 응답.

 Nostalgia, No more Nostalgia.

 

 

 

 

 

누가 그를 하찮은 형이라 했는가. by. 익명
Salvatio by. D. 에르타
꽃잎놀이 by. 허브
사랑의 죽음 by. 춘몽
소년과 소년의 청춘 by. 청
Our Happy Ending by. 창문
힐링이 필요해 by. 징어
Nostalgia (노스텔지아) by. 이든
인어소년 by. 몽환의 오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by. 멜렛
One Step Closer to Blossom by. 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