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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r Happy Ending

정택운X차학연

W. 창문

 

 

 

 

 

 

 

 

아저씨-

 

 

더운 숨결과 함께 야릇한 음성이 귓바퀴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익숙하지만 한편으론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외부의 자극에 감고 있던 눈을 뜨자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기다렸다는 듯이 시야를 가득 채워 왔다. 몇 차례 눈을 깜박여 보았지만 쉽사리 가시지 않는 잠기운 탓에 정신이 몽롱하였다. 그런 와중에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녀석의 입가에 그 나이다운 웃음이 번지는 것만큼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무르익은 과일처럼 벌어진 입술 사이로 짓궂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러고 있으니까-

 

 

“우리 되게 그렇고 그런 사이 같다.”

 

 

안 그래요? 천연덕스럽게 물어오는 녀석에, 나는 그제야 녀석이 내 위에 올라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쓸모없는 종잇조각마냥 얼굴을 무참히 구기며 당장 내려오라고 명령하였으나 녀석은 내 말에 따르기는커녕 오히려 빙글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흐응, 싫은데-. 녀석은 말꼬리까지 늘이며 내 신경을 대놓고 긁어왔다. 그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아 나는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고는 녀석을 조금 거칠게 밀어냈다. 그래도 꿋꿋이 자리를 지킬 줄 알았던 녀석은 그런 내 예상을 비웃듯 너무도 쉽게 밀려났다. 마치 흥미가 떨어진 장난감을 대하듯 녀석이 내 위에서 사뿐히 내려옴에 따라 내 기분은 말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빌어먹을. 하도 내뱉어서 이제는 습관이 돼 버린 욕설을 중얼거리며 머리맡에 놓아둔 담뱃갑으로 손을 뻗었다. 그 안에서 기다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싸구려 라이터로 불을 붙이자 곧 가느다란 연기가 조용히 피어올랐다. 그것을 한 모금 빨아들이려는 찰나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녀석의 손이 순식간에 담배를 낚아채갔다. 나는 망연한 얼굴로 나의 소소한 행복을 앗아간 녀석을 바라보았다. 내게서 빼앗은 담배를 제 입가로 가져가던 녀석은 내 표정을 보고는 그대로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말간 웃음소리가 공간의 빈틈을 채웠다.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던 녀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뭇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어선 내 건강에 대한 염려를 내비쳤다.

 

 

“담배 피지 마요.”

 

 

몸에 안 좋아. 그리고는 담배를 자연스럽게 꼬나무는 녀석에, 나는 실소를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네 몸에는 그게 좋냐.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내아이가 좋아하는 여자아이를 괴롭히듯 잔뜩 빈정대는 어조로 핀잔을 주자, 녀석은 어깨를 한번 으쓱이더니 어린아이의 짓궂은 장난에 침착히 대처하는 어른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한테는 아저씨가 더 중요하니까.”

 

 

예상치 못한 녀석의 말이 묵직한 둔기가 되어 내 뒤통수를 내리쳤다. 그 다음 찾아온 것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울컥, 하고 솟구친 감정. 그때그때 해소되지 못하고 축적된 감정의 덩어리는 서서히 퇴색되어 이젠 주인인 나조차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까다로운 존재가 되고 말았다. 녀석은 늘 저런 말로 나를 흔들어 놓는다. 어린아이가 제 손에 쥔 장난감을 갖고 놀듯이. 아주 손쉽게. 나는 습관적으로 짙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녀석은 태연한 표정으로 뿌연 연기를 내뿜을 뿐이었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는 독성 물질은 공중에서 소리 없이 흩어져 집 안의 공기 속으로 녹아들어 갔다. 폐부로 흘러들어오는 공기에 지독한 담배 냄새와 함께 녀석의 체향이 섞여 있는 것만 같았다. 

 

 

녀석은 반쯤 타들어간 담배를 미련 없이 재떨이에 떨어뜨렸다. 아직 꺼지지 않은 담배는 저의 마지막을 직감한 듯 힘겹게 실 같은 연기를 토해냈다. 그것은 쉽게 소비되고 버려지는 존재가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흔적이었다.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저가 버린 담배가 최후를 맞이한 후에도 그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속내를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선 창가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 크지 않은 창문은 얼룩이 졌음에도 바깥 풍경을 제법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빽빽이 들어선 건물들이 온화한 햇빛을 받아 평소의 음침하고 숨 막히는 분위기가 조금쯤 옅어진 것 같았다. 이 도시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화창한 날이었다.

 

 

“날씨가 참 좋네요.”

 

 

쓸데없이. 녀석은 혼잣말인지 내가 들으라고 한 말인지 모를 어투로 그리 중얼거리고는 신경질적인 손길로 빛바랜 노란색 커튼을 확 잡아당겼다. 하지만 낡을 대로 낡은 천은 제게 주어진 임무를 완벽히 수행해내지 못했고, 때문에 커튼 사이를 꾸역꾸역 비집고 들어온 햇빛이 자신의 출입을 막으려 했던 녀석의 얼굴 위로 긴 빛의 선을 그었다. 반년 전에, 그러니까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확실히 애티가 가신 녀석의 얼굴이 찡그려지는 것을 나는 새삼 낯선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아이와 어른의 경계 지점. 아이임과 동시에 어른인, 때문에 어디에도 완전하게 소속되지 못하여 철저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시기. 내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십 년 전 겪었던 그 외로운 때를 고스란히 보내고 있는 녀석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익살맞은 신의 장난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초기의 인간이 내린 잘못된 선택 탓인지, 몇 세대가 지나도 어김없이 반복되는 혼란의 시기를 거칠 수밖에 없는 인류는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

 

 

“있잖아요, 아저씨. 나는 예전부터 밝은 날을 싫어했어요.” 

 

 

익숙한 정적과 간만의 사색을 동시에 깨뜨린 녀석은 창가에서 한 발짝 물러나며 나를 바라보았다. 낯선 햇빛과 친숙한 어둠에게 각각 반씩 내어준 녀석의 얼굴은 혼란 그 자체를 보여주는 듯했다. 음울한 청색을 띤 시선이 내 눈 위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어린아이처럼 굽은 정도가 심한 곡선을 그리는 입매와는 달리 이미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눈이 서글프게 반짝였다. 하얀 종이에 깊숙이 스며든 잉크처럼 짙은 눈동자가 체념한 슬픔이 깃든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오늘은 뭔가 다르지 않을까, 하고 헛된 희망을 품게 하잖아. 그렇게 사람을 비참한 바보로 만들어버리잖아. 매번.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

 

 

그 순간 나는, 서글픈 눈동자의 주인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한순간 말을 잃은 사람처럼, 그저 눈꺼풀을 발처럼 내렸다 올리기만을 반복하며, 녀석을 멀거니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망연한 내 표정에 녀석은 제 얼굴을 뒤덮은 슬픔의 틈을 비집고 희미한 미소를 내보였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어른스럽게. 

 

 

지금 이 순간, 녀석은 저를 감싼 모든 것들로부터 철저히 배제된 이방인이었다.

 

 

 

 

 

하늘은 금세 평소의 칙칙한 회색빛으로 돌아왔다. 햇살은 두 가지 맛의 아이스크림을 놓고 자꾸만 결정을 번복하는 아이처럼 아직 성숙치 못한 하늘이 부린 변덕과도 같은 것이었던 모양이다. 잠시 도시를 떠났던 먹구름들이 돌아옴에 따라 도시의 건물들은 짙은 회색 물감을 한 겹 덧씌운 것처럼 어두워졌다. 아아, 자연의 일부분에 불과한 날씨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릎을 꿇고 마는 인간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가. 나는 하룻밤 사이에 색을 잃어버린 창밖을 바라보다가, 신문에 대서특필로 게재된 할리우드 스캔들의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둠이 찾아오는 속도가 나날이 빨라지는 것 같았다. 밤이 되자 집 안의 공기가 금세 냉랭해졌다. 행거에 걸어놓은 검은색 코트 안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총알이 들어있는지 확인한 후 그것을 원래 있던 곳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곤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따져가며 코트에 팔을 끼워 넣었다. 내가 나갈 채비를 하자 하루 종일 침대 위에 드러누워 치직거리는 고물 라디오를 듣던 녀석이 힐끗 시선을 던졌다. 

 

 

“오래 걸려요?” 

 

 

글쎄. 직업 특성상 작업 시간을 장담할 수 없었기에 나는 녀석이 그렇게 물어볼 때마다 ‘글쎄,’ 라고 답하였다. 이쯤 되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알고 더 이상 물어보지 않을 법도 하건만, 끊임없이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녀석이나, 또 거기에 꼬박꼬박 답하는 나나 정상이 아님에 틀림없었다. 다분히 영양가 없는 생각에 픽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눈빛으로 이유를 묻는 녀석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집을 나섰다. 잘 다녀오라고 외치는 녀석의 목소리가 빠르게 닫히는 문틈을 용케 빠져나와 내 옷깃을 가볍게 움켜잡았다. 

 

 

 

 

 

거리에 내려앉은 어둠 위로 길가에 서 있는 가로등이 노란 불빛을 던졌다. 자정이 넘은 시각, 시간이 시간인 만큼 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그마저도 비틀거리며 술주정을 부리는 취객들이었다. 그리 좁지 않은 간격이 무색하게도 코끝에 훅 끼치는 술 냄새에 자꾸만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무표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단히 애를 써야 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곡예를 선보이듯 남자는 찻길과 인도의 경계를 비틀거리며 걸었다. 나는 그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세 시간의 진득한 추적을 허탕이 되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주머니 속 권총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탕ー. 단 한 번의 총소리가 차분히 가라앉아 있던 밤공기를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몇 시간 뒤 남자는 지나가는 행인에 의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리라. 가로등은커녕 희미한 달빛의 손길조차 닿지 않아 짙은 어둠에 완전히 잠식된 공간이었음에도 나는 포도주를 쏟은 것처럼 남자에게서 흘러나오는 소름끼치는 선혈이 정돈되지 않은 길을 물들이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참혹한 광경을 외면하듯 뒤돌아섰다. 하지만 이미 머릿속에 선명히 각인되어 죽을 때까지 떠안고 가야 할 기억이 돼 버린 후였다. 나에게는 잊지 말아야 할 장면들이 너무도 많았다.

 

 

온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피로감이 꼭 가득 채워진 모래주머니 같았다. 싸늘한 바람의 포옹을 애써 물리치며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자정이 훌쩍 넘었으니 녀석은 진작 잠들었을 터였다. 문득 녀석이 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궁금해졌다. 나와 함께 있을 때 으레 그러는 것처럼 몇 시간이고 라디오를 들을까? 그 고물 라디오에 대한 녀석의 애정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할 것도 같았다. 처음 샀을 때만 해도 잡음이 그리 심하지 않았었는데. 슬슬 새 라디오 구매를 고려해봐야 할 성싶었다. 

 

 

아파트는 어둠으로 뒤덮여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쥐 죽은 듯 조용하여 내 발소리가 건물 전체에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수명이 다해가는 전등이 힘겹게 밝히고 있는 3층 복도의 맨 끝 쪽 문 앞에 멈춰 선 나는 코트에서 열쇠를 꺼내 마치 금고 털이범이 작업을 하듯이 조심스럽기 이를 데 없는 움직임으로 잠금 장치를 풀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철컥, 울려 퍼지는 짤막한 금속성의 소리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잠귀가 밝은 녀석이라지만 이 정도로 깨지는 않았으리라고 애써 나 자신을 설득하며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복도의 희미한 빛이 집 안으로 흘러들어가 불룩한 이불의 형상을 어슴푸레하게 보여주었다. 

 

 

조용히 문을 닫자 그와 동시에 구름 뒤에서 고개를 내민 달이 지상 위로 미약하게나마 빛을 쏟았다. 그 빛에 의존하여 집 안에 들어선 나는 살며시 침대로 다가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희미한 달빛이 녀석의 얼굴을 말갛게 비추었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넘겨주자 가지런히 감겨 있던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그리고는 이내 검은 눈동자가 얇은 피부 조직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을 하지 못하는 듯한 눈빛으로 얼어붙어 있는 나를 가만히 응시하던 녀석은 잠꼬대를 하듯 어설픈 발음으로 나를 불렀다.

 

 

“아저씨......”

 

 

잠에 취한 녀석의 목소리에 마음 한 구석이 간질거렸다. 마치 깃털 같았다. 하얗고 부드러운, 가정집에서 키우는 고양이가 가지고 놀 법한. 그 묘한 간질거림으로 온 정신이 쏠려 있는 사이 녀석은 침대를 짚고 있던 내 손을 가볍게 움켜잡았다. 갑작스런 온기에 놀라 반사적으로 손을 빼내려 하자 더 힘을 주어 잡아오는 녀석에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같이 자요......잠결에 건넨 것이든 그렇지 않든 녀석의 제안은 나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녀석은 당황하여 바람결에 몸을 내맡긴 고양이풀처럼 흔들리는 내 눈을 잠시 들여다보더니 도로 눈을 감으며 변명하듯 웅얼거렸다. 

 

 

“침대가 너무 넓어서......”

 

 

어느 틈엔가 기척도 없이 다가온 수마는 녀석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그를 데리고 홀연히 떠나버렸다. 내 손을 붙잡은 녀석의 자그마한 손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일어날 수도, 손을 빼낼 수도 없었다. 녀석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녀석은 숨바꼭질을 하듯 구름 뒤에 몸을 숨겼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달과 운명을 함께했고, 그럼으로써 내가 자신에게서 시선을 거두는 것조차 허락지 않았다. 참으로 악랄한 처사가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얇은 커튼 천 덕분에 서서히 날이 밝아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습관적으로 마른세수를 하자 밤새 까칠해진 얼굴이 손바닥으로 뚜렷하게 느껴졌다. 욕실로 가 마주한 거울 속 모습은 예상보다 더 초췌하였다. 눈 밑에 아주 자리를 잡은 지 오래인 그늘이 부쩍 짙어 보였다. 양치질과 면도를 순서대로 끝낸 후 욕실을 나서자, 언제 일어났는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가느다란 다리를 그네처럼 흔들고 있는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웃는 낯빛으로 뒤를 돌아보던 녀석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내 얼굴을 보곤 해사한 미소를 거두었다.

 

 

“잘 잤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안 물어봐도 될 것 같네요. 녀석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침울한 어조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랑 같이 자는 게 그렇게 불편했어요? 울상이 된 녀석의 얼굴과 그에게서 날아온 뜻밖의 물음은 뾰족한 바늘이 되어 내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잠꼬대인 줄 알았는데,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던 나는 어느새 눈을 찌를 정도로 자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어렵사리 쥐어짜낸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니.”

 

 

안 불편했어. 그리 대답하며 흘금 녀석의 표정을 살폈더니 역시나, 내게서 돌아온 의외의 대답에 - 그것은 ‘나’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매우 친절한, 그리고 아주 드문 종류의 답변이었다 - 녀석은 눈썹을 한껏 치켜뜬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도 기분이 썩 나빠 보이지는 않아 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가 아예 잠들지 못했었다는 사실은 영원히 묻어두는 편이 서로에게 좋을 성싶었다. 

 

 

온몸을 두툼한 이불로 휘감은 채 한동안 애벌레처럼 꾸물거리던 녀석은 갑자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으나 녀석은 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고 곧장 욕실로 달려가더니 순식간에 세수와 양치질을 끝낸 후 의자 등받이에 걸쳐 놓은 옷들을 턱턱 입고선 앞뒤 설명 없이 내게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는 휙 집을 나서는 것이었다. 폭풍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덩그러니 남게 된 나는 현관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힐 때까지 녀석의 온기가 남아 있는 침대만 멍청히 바라볼 뿐이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저가 언제 그랬냐고 묻듯 날씨는 천연덕스럽게 화창했다. 햇빛이 투명한 유리창을 뚫고 비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사춘기 소녀에 맞먹을 정도로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이 도시에서의 일기예보는 무용지물이 된 지 오래였다. 내가 간밤에 치렀던 피의 대가를 받기 위한 외출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녀석은 평소와 다름없이 침대 한가운데에 배를 깔고 누워 있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녀석의 머리맡에 못 보던 책 더미가 쌓여 있다는 것. 내가 나름 호기심을 품은 시선으로 - 여기서 ‘나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다른 사람들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 그것들을 바라보며 다가가자 그 기척을 느낀 녀석이 웃는 얼굴로 뒤돌아봤다. 

 

 

“왔어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인사를 건네는 녀석의 목소리가 퍽 발랄하게 들렸다. 크기와 색 모두 제각각인 책들이 서로의 등과 가슴을 맞댄 채 이루고 있는 아슬아슬한 탑을 눈짓으로 가리키자 녀석은 아, 하고 탄성을 터트렸다. 저것들 말이에요.

 

 

“아저씨 나가고 혼자 있으려니까 심심해서.”

 

 

한동안은 괜찮을 것 같네요. 그리고는 짐짓 자랑스럽게 - 마치 명문 대학에 입학한 자식 이야기를 하는 부모처럼 - 책 더미를 토닥여 보이는 녀석에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책값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될 성질의 것이었다. 내 시선에서 나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오묘한 감정을 - 다른 건 몰라도 체념이 많은 지분을 차지했음은 확신할 수 있었다 - 제 식대로 받아들인 녀석은 발끈하여 사납게 쏘아붙였다. 날 대체 뭐로 보고.

 

 

“나한테도 비상금이라는 게 있어요.” 

 

 

그리고 나 완전히 손 뗐다고요, 아저씨 집에 들어온 이후로. 그리고는 손을 탁탁 터는 시늉을 해 보이며 눈을 흘기는 녀석에 나는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그런 내 모습이 코미디 배우처럼 퍽 우스꽝스러웠는지 토라진 얼굴을 하고 있던 녀석은 금방 웃음을 터트렸다. 맑은 웃음소리는 한동안 방 안에 낭랑히 울려 퍼졌다. 그것이 가실 때쯤 이제 다시 책에 집중을 하나 싶던 녀석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를 향해 다시금 시선을 던졌다. 내가 문간에서 신문을 가져와 의자에 앉기까지 그 모든 과정을 바닥없이 까만 눈동자가 집요하리만치 뒤쫓았다. 눈으로 까닭을 묻자 녀석은 어깨를 한번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냥,

 

 

“왜 내가 여태껏 읽은 책들은 하나같이 해피엔딩일까, 묻고 싶어서요.”

 

 

책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어떤 고난과 역경을 겪어도 결국은 해피엔딩을 맞이하는데, 그런 사람이 현실에 얼마나 있을까요. 녀석의 연이은 물음은 질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평서문에 가까웠다. 나는 어떤 대답을 내놓아야 할지 몰라 잠자코 녀석이 말을 잇기만을 기다렸다. 녀석은 애초에 내가 대답하지 못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또는 내 대답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다는 듯 지극히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저씨. 난 말이에요,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 해피엔딩을 맞이한 책 속의 주인공들이 부럽지 않을 만큼.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만큼. 정말 행복해봤으면 좋겠어요.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 당장 죽어도 아쉽지 않을 텐데.”

 

 

기약 없는 꿈에 젖은 목소리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마치 암울한 현실을 외면하듯 눈을 감은 채 녀석의 말을 곱씹었다. 단 한 번만 행복해본다면, 죽어도 아쉽지 않다, 라. 이것을 달리 말하자면 녀석은 행복해지기 위해 불행으로 점철된 삶을 참고 견디는 셈이었다. 언젠가 저에게도 행복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고된 희망 아래, 또는 한 번도 행복하지 않고 죽는다면 억울하다는 생각으로. 어미의 칭찬 하나를 바라고 어린아이가 먹기 싫은 반찬을 억지로 먹듯이. 애석하게도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 신에게서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행운을 타고난 사람을 챙기기에도 바쁘실 신께서 그 외의 하찮은 존재들에게 신경 쓸 겨를이 있을 리가 없잖은가. 이것은 세 살배기 아이도 아는 불변의 진리와도 같은 진실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대적인 진리 앞에서 자신의 한계와 운명의 야속함을 깨닫고 속절없이 무릎을 꿇는다. 

 

 

그렇다면 녀석은, 그리고 나는. 영영 행복해질 수 없는 운명인 걸까? 그것이 거룩하신 신의 뜻인 걸까?

 

 

 

 

 

온 도시에 어둠이 완연한 오후 여덟 시 쯤 브로커로부터 연락이 왔다. 직접 만나서 얘기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의뢰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서는 약간의 초조함마저 느껴졌다. 썩 응하고 싶진 않았지만, 내가 이쪽 세계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부터 줄곧 알고 지냈던 자라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그의 호출을 받아들인 나는 수화기를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외출하는 것조차 다른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삶에 새삼스럽게도 회의감이 들었다. 무거운 한숨이 기어코 입술 사이를 비집고 터져 나왔다. 오전에 입었던 코트를 걸치며 조심스레 녀석의 눈치를 살폈다. 

 

 

“또 나가요?”

 

 

녀석은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지나가는 어투로 내게 물었다. 어, 그게......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대답을 고민했다. 잠시 내 얼굴 위로 녀석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으나 그 느낌은 불과 몇 초 뒤 자취를 감추었다. 잘 다녀와요. 녀석은 민원 청구를 받는 공무원처럼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인사말을 건넸다. 하지만 나는 그 속에서 나를 향한 녀석의 원망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 내가 방금까지 했던 고민 - 어떻게 대답해야 녀석의 기분을 최대한 상하지 않게 할 수 있는지 - 이 다 부질없는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이렇다 할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끌고 집을 나섰다. 닫히는 문 틈 사이로 언뜻 본 녀석은 고집스리우리만큼 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늘 여유로운 브로커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주의사항을 하나씩 알려주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은 그저 귓가를 빠르게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내 정신이 다른 데 팔려 있다는 것을 눈치 챈 브로커가 똑바로 들으라고, 실수 하나 했다가는 곧장 철창행이라고 으름장을 놓았으나 모두 헛수고였다. 결국 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는 나에게 그만 가보라며 두 손을 휘휘 내저었다. 지금 나를 붙잡고 있어봐야 아무런 소득도 없으리란 걸 깨달은 것이리라. 나는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그를 향해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인 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너른 보폭으로 가게를 나섰다.

 

 

밤공기는 가을이라는 계절에 비해 지나치리만큼 차갑고 시렸다. 낮에 해가 모습을 드러내기에 오늘 밤은 덜 추울 줄 알았더니만, 그것은 완전한 착각이었던 모양이라고, 허공으로 피어오르는 희미한 입김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저가 겪은 세월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낡은 아파트로 돌아가는 길에 드문드문 서 있는 몇 안 되는 가로등들이 하나같이 깜박거리는 탓에 나는 그림자와 뜻하지 않은 숨바꼭질을 하게 되었다.

 

 

밤하늘은 작은 구름 하나 없이 황량했다. 때문에 쉴 곳을 잃은 달이 오늘따라 천천히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것 같았다. 나는 마침내 도착한 아파트 앞에 서서 높다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드문드문 불이 켜진 건물은 마치 공포 영화 속에 나오는 장소처럼 나를 위압적으로 내려다보았다. 출입문을 통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마치 괴물의 입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런 곳에는 으레 어여쁜 공주님이 갇혀 있는 법이다. 용감한 기사가 구해줘야 할, 아름답고 가녀린 존재가. 

 

 

안타깝게도 나는 용감한 기사 역을 맡을 위인이 못 되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식탁 앞에 앉아 있는 녀석의 뒷모습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식탁 위의 전등이 녀석의 어깨 위로 노란 불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각진 식탁 위에는 빈 술병과 노란색 액체가 반쯤 담겨 있는 유리잔이 놓여 있었다. 나는 신발장에 우두커니 서서 그 광경을, 결코 익숙지 못한 광경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녀석과 함께 지내는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녀석이 술을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왔어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인사를 건네는 그 목소리가, 오늘따라 왜 이리도 서글프게 들리는지. 녀석은 여전히 내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채근하여 어렵사리 한 걸음 내딛자 그제야 녀석이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녀석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 꼼짝없이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눈물에 젖은 녀석의 얼굴이 노란 조명을 받아 까마득히 먼 곳에 있는 천체처럼 반짝였다. 음울한 미소가 맺힌 입술은 저와 입을 맞춘 유리잔처럼 금방이라도 깨질 듯 연약해 보였다. 

 

 

“왜 이제 왔어요,”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좀체 들을 수 없는 녀석의 투정이 집 안의 탁한 공기를 매개체 삼아 내게로 전해졌다. 아, 평소 나보다 더 어른스럽게 구는 녀석도 결국은 예민한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음을 상기함과 동시에 붉은 입술을 가르고 세상 밖으로 나온 단어들이 날카롭게 쪼개진 돌조각으로 탈바꿈하여 내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첨예한 날에 흉터로 가득한 피부가 찢어지며 붉은 선혈이 흘러나왔다. 가슴팍에서 시작된 통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으로 전이될 터였다. 익숙한 고통에 익숙해지지 못한 내면이 고통에 찬 신음을 토해냈다. 참으로, 지독한 통증이었다. 

 

 

드륵-의자가 뒤로 밀리며 만들어낸 소름끼치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녀석이 넋을 잃고 서 있는 내게 다가왔다. 한 발짝, 한 발짝 옮기는 녀석의 걸음은 가볍다기보다는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비현실적이었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초점을 잃은 녀석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빛을 잃은 검은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이 지나치리만큼 낯설게 느껴졌다. 영원히 좁혀지지 않을 것 같던 간격은 어느새 채 한 뼘이 되지 않을 만큼 줄어들어 있었다. 그리고,

 

 

“......!”

 

 

녀석이 동그란 머리통을 내 어깨에 조심스레 기대왔을 때,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호흡 기관을 비롯한 모든 신체 기관들이 일제히 활동을 멈추었다. 다만 감각 기관들은 예외적으로 평소처럼, 아니 평상시보다 몇 배는 더 예민하져 녀석의 자그마한 숨결 하나, 머리칼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 놓치지 않고 모조리 흡수하였다. 정지된 사고 회로는 그 정보들을 여과 없이 모두 받아들였고, 한꺼번에 밀려들어온 대량 정보에 의해 머릿속은 전쟁 통처럼 혼란스러워졌다. 혼돈 그 자체인 피난민의 행렬 속에서 녀석의 부름이 내게 닿은 것은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자 나를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 차올랐다. 곧이어 연주되는 악기의 현처럼 잘게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아저씨. 한 번만-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해줄래요?”

 

 

나, 그럼 정말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아.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누구도 부럽지 않을 만큼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당장 갈가리 찢겨 죽어버린 데도 괜찮을 것 같아. 그러니 제발. 딱 한 번만,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제발......녀석은 그 말을 끝으로 내 어깨에 다시금 얼굴을 묻으며 여태껏 참아 왔던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가까스로 버텨오던 둑이 터지듯, 걷잡을 수 없을 만큼의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녀석의 얼굴과 내가 입고 있던 옷을 축축이 적셨다. 외투 자락을 움켜쥔 손이 애처롭게 떨리는 것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녀석의 어깨를 토닥이려다가, 뒤늦게 고개를 든 이성에 그만 멈칫하였다. 허공에 버려진 손은 갈 곳을 잃은 방랑객과 진배없었다.

 

 

나는 녀석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 그것은 내 의지를 떠나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피를 손에 묻혀가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감으로써 내 삶을 영위하는 작자였다. 참혹한 광경에 무뎌져 감정이란 신의 선물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자였다. ‘나‘라는 인간은 그런 존재였다. 그런 내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조차 맘 편히 건넬 수 없는 내가, 녀석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아아, 그럴 수는 없었다. 녀석을 바닥없는 불행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내가 어떻게 그러겠는가. 녀석이 행복을 얼마나 갈망하는지 뻔히 알면서. 감히 내가. 어떻게. 

 

 

그런데 만약, 정말 만약에, 녀석의 말이 진짜 사실이라면? 내가 사랑한다는 말을 해줌으로써, 녀석이 정말 행복해질 수 있다면? 

 

 

만일 그렇다면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녀석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수백, 수천 번이라도 녀석이 원하는 만큼 같은 말을 속삭여줄 것이다. 녀석이 진정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난. 나 자신을 기꺼이 바칠 것이다. 설령 내가 신의 뜻을 거스른 죄로 천벌을 받게 될지라도. 

 

 

나는 녀석이 행복해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녀석은 시곗바늘이 오전 열 시를 가리킬 때까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정각부터 분침이 숫자 3에 가까워질 때까지 의자에 앉아 녀석을 바라보던 나는 녀석의 입에서 흘러나온 앓는 소리를 듣자마자 황급히 탁자 위에 올려놓은 신문을 펼쳐 들고는 그때서야 녀석을 처음 쳐다보는 것처럼 태연하게 몸을 돌려 침대 위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머리를 짚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로 곧장 뛰어 들어왔다. 접착제를 붙인 듯 억척스럽게 눈동자를 덮고 있던 눈꺼풀이 이내 위로 물러나며 몽롱한 빛의 눈동자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초점 없이 천장만을 담고 있던 녀석의 눈은 약 삼 분가량이 지나고 나서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기나긴 항해 끝에 마침내 찾아낸 항구에 정박하는 배처럼, 내게서 멈춰선 녀석의 시선은 좀처럼 나를 떠날 줄 몰랐다. 나는 녀석의 시선을 견디기 힘들어 슬그머니 욕실로 달아났다.

 

 

내가 다시 거실로 나왔을 때 녀석은 침대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었다. 무엇을 그리도 심각하게 생각하는지 녀석의 미간에는 험준한 협곡을 연상시키는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거실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발견한 녀석의 입술이 몇 차례 달싹거리더니 이내 초조함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혹시,

 

 

“어젯밤에 내가 아저씨한테 무슨 실수 안 했어요?” 

 

 

실수라. 녀석의 물음에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줄곧 나를 집요하게 괴롭혀 오던 기억이 다시금 숨구멍을 틀어막아 왔다. 나는 신문을 접어 탁자 위에 올려놓은 후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그게 무슨 뜻이냐고 눈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녀석은 평소의 저답지 않게 횡설수설 이런저런 예시들을 늘어놓았다.

 

 

“그러니까...막말을 했다든가, 보기 흉하게 울었다든가, 구토를 했다든가 뭐 그런......”

 

 

아니,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내가 딱 잘라 말하자 녀석은 그럼 다행이고요, 라고 중얼거리며 한동안 미동조차 하지 않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였다. 흡사 광장에 세워진 조각상 같던 녀석이 인간으로 되돌아온 것은 내가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워갈 즈음이었다. 녀석은 날렵한 고양이처럼 벌떡 일어나 퍽 우아한 몸짓으로 바닥에 발을 디디더니 예의 간들거리는 걸음걸이로 부엌에 들어섰다. 다행히 평소 상태로 돌아온 모양이라고, 신문을 다시 펼쳐 들며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내 눈은 여전히 녀석을 쫓고 있었다. 

 

 

녀석은 이 집에 있는 동안 셀 수 없을 정도로 반복한, 습관과도 같은 동작들을 선보였다. 찬장에서 설탕과 커피를 꺼내고, 머그잔 두 개를 싱크대에 내려놓은 뒤 스푼 한 개를 꺼내는. 그 일련의 동작들이 군더더기 하나 없이 매끄럽게 연결되어 마치 숙련된 발레리나의 우아한 몸짓을 보는 것만 같았다. 손끝에도 감정을 실어 자신이 맡은 배역과 하나가 되는, 기교의 절정. 아이러니하게도 기교가 최상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 애초에 그것으로 하여금 표현하려 했던 진심은 바닥에 내팽개쳐진다.

 

 

“반대로 내가 아저씨한테 사랑한다고 말하면 어떡할 거예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표현이 지금 상황에 완벽히 부합하지 않을까? 녀석의 느닷없는 - 그렇지만 어젯밤 있었던 일을 정확히 기억하지 않는 이상 할 수 없는 - 질문에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녀석을 쳐다보았다. 안타깝게도 녀석이 등을 돌리고 있는 탓에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녀석은 두 잔의 커피에 설탕을 각각 세 스푼씩 타며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도망이라도 갈 건가 보네요. 

 

 

“그래서 말하지 않는 거예요. 내가 아저씨를, 이토록......특별하게 생각하면서도.”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두 잔의 커피를 들고 뒤돌아선 녀석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그게 더 슬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녀석에게서 커피를 건네받은 후에도 한참 동안 이렇다 할 대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경우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녀석이 내게 사랑한다고 고백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지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녀석은? 녀석은 나만큼 행복해질까? 쉽사리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나는 눈을 감았다. 만일. 그렇게 함으로써 녀석이 행복해지기만 한다면.

 

 

“......도망,”

 

 

가지 않을 거야. 조용히 감고 있던 눈을 뜸과 동시에 나는 절대로 번복하지 않을, 번복해서는 안 될 대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멍한 표정의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눈에는 불신과 희망이 뒤섞인 기묘한 감정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나는 녀석과 시선을 마주치며 확고한 어조로 덧붙여 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네가 행복해진다면.”

 

 

달아나지 않을 거야. 절대로. 그것은 녀석에게 하는 굳은 맹세임과 동시에 내가 평생 동안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할 다짐이었다. 말없이 나를 응시하던 녀석의 눈에 차츰 눈물이 고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커튼 사이로 흘러들어온 햇빛에 이슬처럼 반짝였다. 나는 녀석을 내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가만히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내가 녀석에게 처음으로 건네는 위로였다.   

 

 

창밖에는 여우비가 내고 있었다. 

 

 

 

 

 

 

 

 

Fin.

 

 

 

 

 

 

누가 그를 하찮은 형이라 했는가. by. 익명
Salvatio by. D. 에르타
꽃잎놀이 by. 허브
사랑의 죽음 by. 춘몽
소년과 소년의 청춘 by. 청
Our Happy Ending by. 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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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stalgia (노스텔지아) by. 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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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by. 멜렛
One Step Closer to Blossom by. 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