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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로마신화의 하데스-페르세포네 이야기를 차용했습니다만 기존 신화 내용과 상당 부분 다릅니다.

 

 

 

“여전하네, 여긴.”

 

 

학연이 맨발로 잔디를 툭툭 차니 그 위로 달렸던 이슬들이 발등위로 떨어졌다. 슥슥 발을 밀며 나아가자 학연이 밟아 숨이 죽어버렸던 초록빛은 그제야 다시 제 몸 일으켜 본래 색을 되찾았다. 저승의 신, 꽤나 오랜만의 이승 산책이다.

 

 

 

 

 

<사랑의 죽음>

정택운x차학연

w. 춘몽

 

 

 

 

 

 

죽음을 관장하는 신인 학연은 오직 저승에서만 머물다 일 년에 겨우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의 횟수로 이승에 올라온다. 태양이 달에게 먹혀 빛이 어둠에게 굴복하는 하루-후대 사람들은 이를 일식이라 말하더라-가 그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누가 그랬는가. 신입 망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하며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가길 바라는 소리들로 저승을 채웠고, 먼저 저승 생활을 하고 있던 자들은 저승에서의 삶에 대한 불만 혹은 이승에서의 삶에 대한 넋두리들을 늘어놓았다. 이들의 핏기 없는 안색은 이승보다 한껏 낮은 온도에 더욱 질려 갔다. 

 

 

학연은 이러한 본인의 근무 환경 및 거주 환경에 딱히 불만을 가지고 있진 않기 때문에-오히려 죽은 자들의 아우성치는 괴로움을 듣는 것이 꽤나 즐거웠기에- 신들의 정기모임조차 이승의 일을 저가 왜 간섭하느냐 댁들 알아서 잘 하슈, 하며 드롭해 버리기 일쑤였다. 이쯤 되면 신들이 학연에게 무어라 하지 않을까 싶다만 그들은 어느 누구도 학연 앞에서 불편한 기색 하나 나타내지 않았다. 신들의 신인 J조차 그런 차에게 명령할 수 없었으니 말 다했다.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모두가 기피하는 저승을 관할하고 있음이다. 학연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또 잘 이용해 먹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극적인 합의점을 타결했다. 온 세상 어둠을 내릴 테니 그날은 신들의 회의에 참석하라/참석하겠다. 덕에 태양을 관장하는 신은 일 년 중 최소 하루는 쉬는 날이 보장되어 그 뒤를 노리고 있는 자가 여럿이더라는 풍문은 덤이다. 

 

 

 

 

 

*

 

 

 

 

 

“회의 그거 백 년에 한 번이면 딱 적당할 것 같더니만. 뭐 이렇게 자주 해.”

 

 

학연이 이승에서 온 전갈을 받고 하품을 따분히 흘려보낸다. 회의랍시고 참석을 하자면 늘 테이블 위에서 오가는 말은 저번 회의에 들었던 말들이다. 차라리 몇 백 년 전 이승의 이제는 사라진 한 국가에서의 탁상공론이 더 의미 있겠다 싶을 정도다. 의제의 결론은 결국 J가 이미 정해놓은 뜻으로 내리는 수순이었다. 즉, 회의는 하등 쓸모없다는 뜻이다. 지루한 회의의 끝은 언제나 넥타르와 음악임은, 망자로 찾아온 자가 환생하여 다시 망자로 찾아오길 수번을 거듭해오는 동안 지겹게도 보아왔던 사실들이다. 타인의 일에는 일절 관심 없으며 말 따먹기는 더더욱 질색인 학연이 저는 참석하지 않겠다고 으름장 놓을 수도 있겠지만 못 이긴 척 가는 것은, 그래도 저를 믿고 저승까지 따라온 몇 안 되는 제 보필들에게 압박이 가해지기 때문이다. 입에 오르내릴 좋은 성품을 지녔다 듣고 싶은 것은 아니다만, 입에 오르내릴 악한 성품을 지녔다 소리 역시 듣고 싶지 않았다. 

 

 

저들도 따라 올라갈 채비를 할까요, 물어오는 것에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신했다. 앉아 집무를 보는 옥좌의 팔걸이를 손가락 끝으로 툭툭 쳤다. 울림이 좋은 장내에 학연의 단백질의 그것과 의자를 이루는 석회가 맞부딪쳐 마찰음이 퍼졌다. 그래도 역시 가기 싫은 건 가기 싫은 것이다.

 

 

 

잡혀진 집회의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유독 이맘쯤이면 원인 모를 입저[저승에의 입문]가 늘어 학연도 덩달아 신경 쓸 것이 많아졌다. 저 위의 인간 세상은 발전이란 도통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수어 년 전에도, 수십 년 전에도, 하물며 수천 년 전에도 망자들이 내뱉던 말들이 이렇게야 틀에 찍어낸 듯 동형일 수는 없는 일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고위 관직들은 망자들의 표정만 보아도 그들의 입에서 나올 대사를 미리 점찍어 읊었고 간간이 심심찮은 내기도 벌어졌다. 

 

 

자잘한 일들은 대부분 아래 측에서 다 해결되기에 학연은 그들의 선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일들과 총체적인 것들만 간단히 살펴본다. 그 일조차도 지겨우니 제 아랫것들이 얼마나 따분할까 훤히 예상되는 바였다. 우매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을 J는 어찌 그리 어여삐 여기는 일인지 학연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하루만 해도 ‘저는 정말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지인이 꼬드겨서.’라는 변명을 정확히 630번째 듣는 순간 학연은 이번 집회에 가서 댁이 다스리는 것들은 학습이라는 걸 모르오, 뾰족이 따질 참이었다. 

 

 

 

*

 

 

 

한편 J의 아들인 택운은 학연과는 반대로 이번 집회를 상당히 고대하고 있었다. 오늘은 그의 디데이였다.

 

 

 

 

*

 

 

 

택운은 사랑의 신이다. 사랑은 누구보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어야 한다며 택운은 신으로서 성체의 나이가 다 되어서도 어린 아이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택운은 딱히 그에 대한 불만을 갖지 않았다. 온종일 하늘을 휘젓고 다니며 운명인 두 사람에게 큐피트의 화살을 쏘아주는 것도, 간혹 벌 받아 마땅한 자에게는 사랑해서 안 될 사람을 사랑하게 만드는 일도 성체보단 조그만 체구의 것이 더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는 과거형 시제이다. 

 

 

저 역시 신들 중 하나인데 신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말이 되냐며 미(美)의 여신인 제 어미에게 졸랐다. 저를 사랑해 마지않는 어미임에도 택운의 그 부탁에는 난처한 기색을 띠며 홀로 나서길 수차례. 결국 호기심 많은 사랑은 몰래 훔쳐보기를 시도한다. 어미가 회의에 참석하고는 적당한 때에 택운도 그녀를 따라 나섰다. 저를 발견한 경비들은 그저 서로를 마주보게 하여 화살을 쏘아주면 그만이었다. 그 뒤는 화살이 만들어낸 그들의 격정적 사랑이 도와주었다. 진작 이럴걸. 택운은 두 몸이 한 몸인냥 철썩 달라붙어 질척한 소리를 내는 경비를 뒤로 한 채 깨금발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작은 몸집과 이미 집회에 참석한 신들의 한껏 올라있는 흥취 덕에 들키지 않고 기둥 뒤에 숨어 그려왔던 집회를 눈에 담아낼 수 있었다. 

 

 

으레 인간들 역시 그러하다. 어릴 때 호기심을 가지고 있던 우상 따위의 것들을 막상 어른이 되어 행하게 되면 정말 별 것 아닌 일들이라 실망하길 대부분. 택운 역시 그러했다. 무언가 대단한 것으로 채워질 것만 같던 집회는 그저 저가 매번 보아오던 주변 신들의 농담 따먹기와 조금은 짙은 색의 대화가 술과 함께 오고 갔다. 신이든 인간이든 누가 더 나을 바 없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내 인간도 신이 만든 산물임을 자각하고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인정했다. 제작된 것은 결코 제작자의 품성을 벗어나지 못함을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 환상으로 남겨둘걸 그랬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택운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저와 같이 집회엔 일말의 흥미도 없다는 듯 의자에 다리를 꼰 채 앉아 심드렁하게 올려진 다리를 앞뒤로 흔들고 있는 학연이. 저가 평소에 돌아다니며 보지 못한 얼굴이다. 그렇다면 새로이 탄생한 신이거나 제 활동 범위와 겹치지 않는 신이라는 것인데. 음. 택운은 곱슬기 있는 제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빙빙 돌려가며 만들어두었던 경우의 수를 하나씩 제거해나갔다. 근래 새로 신이 생겨났다면 필히 떠들기 좋아하는 제 어미가 저에게 전해왔을 것이니 새로운 신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저와 활동 영역이 겹치지 않는 신이라는 건데.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택운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한 신이 있었으니 저 이가 그 악명 높은 지하 세계의 신인가 싶다. 서늘한 인상에 세찬 성격이라더니 역시 소문은 믿을 바 못 된다. 서늘하긴 무슨, 미의 여신이라는 제 어미보다 곱기만 하다. 성격도 그리 세차 보이지 않은 것 같은데 하는 순간 학연이 일어나 연회장을 나섰다. ‘거 댁들 할 말 다 들은 것 같으니 전 이만 가보겠소.’ 세차긴 하네.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나지 않는다고, 소문이라고 모두 흘려보내선 안 된다 다시금 생각했다.

 

 

그날로 사랑은 또 다음 차례의 집회가 열리길 꼬박 기다렸다. 죽음은 매번 조용히 왔다 홀연히 사라졌다. 사랑과 죽음이 한 공간에 있던 것이 제법 많은 횟수가 누적되면서부터 어느새 사랑은 제 몸통의 두 배 넓이를 가졌던 기둥 뒤로 몸을 온전히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자라났다. 기둥 뒤로 비죽 나온 어깨를 들키고야 J에게서 다음 집회부턴 택운 역시 정식으로 참석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택운은 그러겠노라 하며 굵어진 몸통과 소리로 답했다.

 

 

 

 

 

*

 

 

 

 

 

“어머니, 저승에 가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저승이요? 그 칙칙하고 기분 나쁜 곳은 왜. 잠깐 들르는 것조차 좋지 않은 영(靈)이 붙을까 염려됩니다. 어미를 걱정시키고자 함이 아니라면 부디 그런 생각일랑 마세요, 사랑.”

“들르기 위함이 아닙니다.”

 

 

살기 위함입니다, 뒷말은 아무래도 저를 걱정할 모친을 위해 삼키기로 한다. 그저 궁금해서 그렇다는 말에 이미 저보다 한참이나 커져 뒷목을 젖히고야 눈을 마주칠 수 있는 택운이지만, 그래도 어미의 눈에는 아직도 젖먹이 어린 아이와 같아 작은 몸집일 때 제 허벅지에 뉘여 놓고 인간세(世) 이야기를 해주던 것처럼 택운의 곱슬머리를 한 올 한 올 정리해가며 말해준다. 

 

 

간단하네. 고르게 들려오는 제 어미의 말을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았다. 택운은 그날 이후 집회에 꼬박 참석하여 제 얼굴을 내비췄고, 그 정성 물거품 되지 않도록 꼭 학연의 반대편에 자리 하기 위해 힘썼다. 물론 먼저 말을 건네도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학연인지라 딱히 그 수고로움에 대한 보상이 돌아오지는 않았다만. 요는 택운은 자연스럽게 스며들기 바랐고, 그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시기를 놓친 사랑은 제 아무리 절절해도 타다만 장작이 되어버려 한 번 사용해보지도, 그렇다고 되살리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기 마련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학연과의 대면이 대번을 넘긴 그날 역시 집회가 채 끝나기 전에 나서는 학연의 뒷모습을 보며 택운은 결론을 내렸다. 운명적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사랑이란 그저 호르몬의 농간이니 제 권능을 빌려야겠다. 무릇 불붙지 않은 장작엔 불씨만 올리면 되는 법.

 

 

그리하여 정해둔 결전의 날이 바로 다음 집회였다. 그날 이후 더디게만 굴러가던 천체 전부에 드디어 어둠이 내렸다. 어디 하나 빛이 새는 곳은 없는지, 도망친 별은 없는지 분주한 밤의 신의 모습을 보며 택운도 학연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사랑의 신이 사랑에 쩔쩔 매는 것은 아무래도 모냥 빠지니 단번에. 택운은 저 아래 지상에서 맨발로 잔디 위를 거니는 학연의 모습을 보며 촉만 부러트린 제 화살에 손끝을 대어 둥근 원을 그리며 매만졌다. 

 

 

 

 

*

 

 

 

 

“사랑의 신, 택.”

“택운요. 볼 때마다 말씀하셔서 그 정돈 압니다.”

“말할 때마다 아무 말씀 없으셔서 모르시는 줄 알았죠.”

 

 

택운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여느 때와 같이 목적이 분명한 인사차 이름을 알렸더니 만남 중 처음으로 택운의 말을 훔쳐 내놓는 학연이었다. 나쁘지 않은 시작이군. 더 대화를 이어 나갈 생각은 없었는지 평소와 다름없이 성가심을 담은 얼굴로 학연이 자리에 앉자 택운도 함께 옆 의자를 당겨 앉았다. 곧 의제가 주어지고 회의가 시작되자 택운은 소매 아래 숨겨둔 화살촉을 확인하며 적절한 타이밍을 살폈다. 촉에 닿고 처음 보는 자에게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면 저와 학연이 마주보며 대화해도 어색하지 않을 시간은, 역시 술인가. 회의 중 택운의 모든 신경은 제 소매 아래와 학연에게로 가있었다. 주목받지 않을 타이밍을 엿보다 왜 집중하지 않느냐는 말을 기어코 듣고서야 학연 쪽으로 미세하게 돌려져 있던 몸을 틀었다. 

 

늘상 같은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평소보다 길었던 집회가 마무리 되자 언제 의제들이 놓여있었냐는 듯 테이블 위는 순식간에 술과 음식들로 채워졌다. 학연은 더 볼 것 없이 자리에 일어나 회의장 나갈 채비를 했다. 

 

 

“저기.”

 

 

학연은 ‘감히’ 제 손목을 잡는 무례를 범한 이를 신경질적으로 쳐다보았다. 시선보다 조금 높은 곳엔 택운의 얼굴이 있었다. 사랑의 신이라고 했던가. 늘상 제게 이름을 말해오며 웃는 낯이 저와는 맞지 않다 생각하던 이였다. 고작 이름 한 번 말해주었다고 손까지 잡아올 일인가 싶어 뿌리치려는 찰나 제게 술잔을 건네는 하나의 손이 더 있었다.  

 

“아.” 

 

순간 닿는 자극에 손목 쪽으로 고개를 내렸다 다시금 느릿하게 제자리로 들어 올리니 사랑의 얼굴이 있었다.

 

 

 

“같이 한 잔 하셨으면 하는데 역시 불편하신가요.”

 

 

학연은 뿌리 친 쪽의 손을 반대쪽 손으로 겹쳐 잡곤 황급히 집회장을 나섰다. 

 

 

 

 

 

 

*

 

 

 

 

 

매사 무관심해 보여도 저승을 다스리는 자로서 맡은 바 업무는 완벽히 해내던 학연은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덕에 제 업무들은 모두 아랫사람들에게 넘겨졌다. 생전-신에게 생전이란 말을 쓰는 것이 가당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지 않던 학연이 종일 멍하게 보내길 수 일째.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닌가, 곧 괜찮아지시겠지 하며 걱정하던 관리들은 과중된 업무에 하나둘 불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신 겁니까. 집회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물어오는 말에 학연은 그저 침묵을 지켰다. 

 

 

무슨 일이라. 있기야 있었지. 학연은 며칠 간 제 상태의 원인에 대해 너무도 잘 알았다. 상사병, 그래 차마 제가 가장 아끼는 자들에게도 터놓을 수 없는 이유였다. 저승의 신이라더니 정말 몸에 피가 돌지 않는 게 아니냐던 학연의 명성에 먹칠할 일이었다. 도망치듯 집회를 나온 이후로 동동 떠다니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떠 자기 직전 눈을 감을 때까지 동동. 택운의 얼굴이 동동.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사라지겠지. 그렇게 몇 밤이 흘렀는지 모른다. 그럴수록 처음엔 그저 동동 떠다니기만 하던 택운의 얼굴이 더욱 진해졌고, 종국엔 학연에게 말까지 걸어오는 지경이 되고야 학연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사랑에게 빠졌음을. 죽음은 사랑에 빠졌다.

 

 

인정하고부터는 마음은 편해졌다. 정확한 형체 없이 두루뭉술하게 부유하는 택운이 말을 걸어오면 학연도 그에 답을 한다거나, 가끔은 먼저 말을 걸기도 했다. 그러다 택운을 힘들이지 않고도 명확히 그려낼 수 있게 됐을 때쯤이면 제 취향에 맞춰 택운의 모습을 바꾸어 보기까지 했다. 물론 그런 학연을 이상하게 보는 주변의 시선쯤이야 가볍게 무시했다.

 

 

저승을 다스리다보면 사사로운 감정은 불필요한 것이며 도리어 일에 지장을 준다. 운명을 관장하는 주제에 제 감정 하나 잘 다스리지 못하는 운명의 신이 간혹 제 기분을 거스르는 일이 생기면 심술을 부려 정말로 억울하게 이승을 떠나 입저한 사람들이 존재했다. 그들의 사연을 듣고 있자면 냉철하기 그지없는 관리들도 코끝이 찡해지는 경우가 더러 있을 정도였다. 그럴 때마다 학연은 심드렁하게 툭 내뱉는 것이다. 

 

 

“거 이미 죽은 걸 어떡하겠소. 그런 사람들이 여기 수백 명이 넘으니까 사연팔이는 거기까지 하쇼.”

 

 

그러면 관리들은 뒤에서 혀를 내두르며 박수를 쳤다. 괜히 죽음이 아니셔. 저승의 관할은 학연의 적성에 딱 들어맞았다. 감정이라곤 전혀 연(緣)이 없어 분노와 동정심 따윈 쉬이 일지 않았고, 덕에 누구보다 이성적인 판단을 신속하게 내릴 수 있었다. 죽음은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를 보이지 않았고,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 신속한 냉정은 사랑에 있어서도 적용되었다. 욕심이라곤 느껴본 적 없던 학연에게 이제 욕심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진짜의 택운이. 보고 싶고, 만지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게 되니 학연의 이성이 간단히 말했다. 그럼 옆으로 데리고 와서 보고 만지면 되겠네, 결단은 찰나였고 그때부터 학연의 일상은 집회가 다시 열리는 날만을 고대하는 것이 되었다. 

 

 

 

 

 

 

*

 

 

 

 

 

 

학연이 택운의 턱 끝을 잡아 올렸다. 눈을 내려 깔곤 그 끝에다 제 입술을 맞대었다. 슬쩍 들어 올려 본 택운의 얼굴에는 이렇다 할 어떠한 표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자신의 권능을 조금 써-조금이라고 하기엔 학연이 가진 ‘죽음의 부름’이란 권한을 거부할 능력이 있는 자는 신들 중에도 몇 되지 않는다만- 저승으로 택운을 훔쳐오기까진 별다른 탈 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택운은 자신의 의사를 밝히지 않았을 뿐이지 다행히 집회에서 학연에게 꽤나 호의적이었고 순순히 제 의도에 따라주었다. 오히려 이렇게 쉽게 진행되어도 되나 의문이 들 정도였지만, 평소 제게 부단히도 말을 걸어오던 택운을 떠올리며 잡념을 접었다. 때문에 택운의 무표정이 부정의 의사는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는 움직임을 이어갔다. 

 

 

긴장하여 메마른 학연의 입술에 좀 전까지 넥타르를 머금고 있어 촉촉한 택운의 것이 닿았다. 택운이 혀를 내어 물기 없는 학연의 아랫입술을 적셔주자 학연의 속눈썹이 덩달아 떨렸다. 

 

 

그와 함께 학연이 손을 뻗어 제 옆의 과일 접시 위를 더듬었다. 택운이 학연의 윗입술을 이로 아프지 않게 물자 학연 역시 손 안으로 들어온 석류 과실 한 가운데를 힘주어 쥐었다. 알맹이 몇 개가 학연의 손으로 튕겨 들어왔다. 손가락을 굴리니 손바닥에서 손가락 마디를 타고 알들이 굴러들어왔다. 개중 하나를 입술로 물어들곤 다시 택운의 입에 제 입을 맞추었다. 그리곤 혀로 제 입술 사이에 있던 알을 반대편으로 밀었다. 그에 택운은 여즉 아무 일 않던 손을 들어 올렸다. 택운의 엄지가 둘의 입술 사이에 위치했다. 엄지에 힘을 주자 학연의 입술 사이에 있던 석류 알이 택운의 손가락과 함께 학연의 혀 위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지그시 눌리자 탄력 있는 알이 톡 터지며 신맛과 함께 엄지에서 오는 짭조름한 무게가 덮쳐왔다. 산미에 한쪽 눈을 찡그리자 택운의 손가락이 학연의 혀 밑으로 옮겨갔다. 

 

 

손끝으로 혀 밑 돌기를 살살 긁어내다 종래엔 무게를 실으니 학연은 제 좁은 입안을 스스로 수축하여 그 속살과 택운의 것을 밀착시켰다. 식간에 습하게 감싸오는 촉감에 택운은 남은 손을 들어 학연의 손에 가져다 맞대었다. 구부려진 손끝이 펴짐과 함께 두 손바닥이 온전히 맞추어지자 학연이 채 넣지 않았던 남은 석류 알들이 두 손바닥 사이를 받쳤다. 깍지를 끼듯 택운의 손가락이 학연의 손가락 사이를 가르며 들어오자 제 것이 아닌 손 주름이 여실히 느껴져 왔다. 학연은 이보다 은밀하면서도 노골적인 플러팅은 있을 수 없다 생각했다. 승모근이 쭈뼛 섰다. 

 

 

제 손을 온전히 덮쳐올 것이라 생각했던 택운의 큰 손은 예상과는 달리 쉽게 떨어져나갔다. 손 안에 있던 알들 역시 택운의 손과 함께 했다. 택운이 엄지를 굴리니 쉬이 학연의 입술이 열렸다. 열린 틈 사이로 마저 밀어 넣으니 저를 떠났던 알들이 학연의 입 안으로 돌아왔다. 혀를 말아 입천장에 대어 밀어보니 대여섯 개의 것들이 알알이 구른다. 의아한 시선을 택운에게로 떨어뜨렸다. 시야로 살짝 기울어진 택운의 고개가 보이더니 이내 입술이 익숙하게 닿는다. 재지 않고 곧바로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살덩이는 학연의 좁은 입안을 가득 채웠다. 

 

 

얌전히 혀 위에 놓여있던 알들이 곧 학연의 입안 곳곳으로 흩어졌다. 그중 두어 개는 채 씹혀지지도 못한 채 학연의 목구멍 뒤로 넘어갔다. 갑작스런 목 넘김의 반작용으로 잔기침이 올라오자 택운이 잠깐 입을 떼어 그 길을 터주었다. 내어진 길을 따라 기침들이 잘게 흘러나가자 그이상은 허락지 않는다는 듯 두 입술이 급하게 맞물렸다. 뜨거운 숨과 낯선 이의 타액이 섞여 들어왔다. 택운이 거친 손길로 학연의 뒤통수를 잡아 헤집었다. 곧 택운의 중심부가 따라붙어 학연의 것에 비벼지자 학연은 처음의 목적도 잊어버린 채 택운의 목뒤로 제 팔을 감았다. 제 몸 쪽으로 택운을 당겨오자 더욱 단단해지는 택운의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택운 역시 같은 것을 느꼈으리라. 학연은 눈을 내리깐 채 제 입술에 집중하고 있는 택운이 맹수의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입안은 사방으로 톡톡 터져대는 석류 알맹이에 시고 축축했으며 뜨거웠다. 맞닿은 두 혀가 기세 좋게 서로를 옭아맸고 떨어지는 그 살덩이가 아쉬워 학연은 혀끝으로 톡 택운의 것을 건드렸다. 길게 타액을 늘어뜨리며 떨어지는 택운의 입안으로 학연이 쳐낸 짓눌린 알 하나가 섞여 들어왔다. 

 

 

“잘하셨습니다.”

 

 

뜻 모를 말을 건네며 택운이 학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랑 앞에 죽음은 옷가지 하나 남기지 않고 벗어내어 제 온전한 몸을 드러냈다.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가는 옷가지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택운은 곧 학연의 손을 잡아 손가락 끝부터 잘게 입을 맞추었다. 손가락 마디를 타고 내려가던 입술은 손바닥을 지나 손목에서 움직임을 잠시 멈추었다. 맥박의 생동을 느끼며 혀를 내어 부드럽게 쓸어 올리자 닿는 자극에 절로 학연의 발가락이 움츠러들었다. 택운의 높은 체온의 손이 학연의 낮은 체온에 닿았다. 제 발바닥을 쥐었다 놓으며 주무르는 택운의 손길이 간지러워 몸을 살짝 비틀어 빼내자 택운이 다시금 두발을 감싸 쥐었다. 그리곤 고개를 숙여 말라 뼈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발등에다 경건히 입을 맞추곤 떨어진 학연의 옷가지를 주워들었다. 일으켜지는 택운의 상체를 따라 학연의 시선이 옮겨갔다. 곧 택운의 손에 든 옷은 학연에게로 걸쳐졌고, 살결 하나 보이지 않게 여며주는 손짓이 뒤따랐다. 물음을 담은 시선이 택운에게 닿으니 학연의 머리를 정리해주며 그 이마에다 입술을 가벼이 대었다 떨어졌다. 

 

 

“우리는 영원의 시간을 선택했으니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

 

 

 

 

 

 

 

 

“어머니, 저승에 가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이 어미도 그곳에 가보지 못해 잘 알지는 못합니다. 허나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곳은 여기보다 조금 더 낮은 기온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곳으로 가는 것은 생명체가 명(命)을 다해 혹은 그들 스스로 명을 끝내 스틱스 강을 건너는 방도밖에는 없다고 합니다. 죽지 않는 이들은 저승을 지키는 자가 있는데 저번에 말했었지요, 그 학연이라는 신. 죽음이 그가 사는 곳을 허락해야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다만 그것이 J에게도 해당되는지는 모르겠네요. 저승에 들어가게 되면 저승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그들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저승에서 난 음식을 먹고서야 저승에서 살아갈 수 있는 그들의 일원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사랑은 혹여나 실수로라도 저승의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하면 J조차 사랑을 다시 어미의 곁으로 오게 할 수 없으니 조심, 또 조심하세요.”

 

 

택운은 고르게 들려오는 제 어미의 말을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았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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