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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Lo3lxS-6joY

 

꽃잎놀이

 

W. HERB

 

나는 무시하려고,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내 감정의 거듭된 오류라고 너에게 경고했었다.

 

내 옆에 영원히 머물러 줘.

 

***

 

항상 아침의 하늘이 제일 맑고 예뻤다. 저녁에는 그렇게 폭우가 쏟아지더라도, 그렇게 구름이 많고 새까맣더라도 결국 아침에는 다시 깨끗해지기 때문이었다. 무엇이든 다시 원래대로 돌이킬 수 있다는 의미를 알려주려는 것 같았다. 그래도 간혹 가다가 새하얀 구름들 사이로 끼어있는 작은 먹구름을 보면 다시 시무룩해졌다. 모순이 있는 거 같아서, 그래서 그랬다.

 

오늘은 제 발로 오랜만에 거리에 나가는 일이 생겼다. 비록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거슬리는 조건이 따라붙어야 했지만. 그래도 제 발로, 자유의지로 밖에 걷는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몰랐다. 제 가슴에 한동안 묶여있던 밧줄이 풀려서 숨통이 트였다.

 

그렇게 대중의 관심을 갈구하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다 옛일이 되어버렸다. 개구리가 올챙이적 일 모르다더니 자신도 그 꼴이 되어버렸다. 얇은 청바지와 셔츠가 제 몸에 딱 달라붙어서 항상 매니저 형이 많이 좀 많이 먹으라던 그 잔소리가 떠올랐다. 이제는 자연스레 입맛이 없어서 먹지 않게 된다. 그냥 우울하게 된다.

 

길거리는 사람이 없고 한산했다. 빈 거리는 회색빛에서 색깔이 점점 채워지고 있었다. 아침의 차가운 공기가 사람들의 가슴에 스며들어 그들에게 감정과 생기를 불어넣었다.

 

아직 닫혀 있는 작은 빵집과 아침 부지런히 문을 여는 편의점들과 도너츠를 구워 파는 작은 상점, 작은 옷가게들을 가득 품은 거리였다. 그리고 도너츠 상점 옆에 놓인 생각보다 꽤나 크게 자리를 잡은 건물.

 

제가 방문해야 할 디자이너 샵이었다. 곧 있을 공연을 위해서 의류 디자이너한테 의상을 부탁해놓았다. 큰 건물을 보니 잘 나가는 디자이너 인듯 했다. 얼마나 옷을 잘 디자인하길래 제 회사도 그렇게 자랑스럽게 그에게 맡겼나 궁금해졌다.

 

그 넓은 건물의 문에 다다랐다. 투명한 유리창으로 보이는 널브러진 옷가지들과 옷걸이들, 재봉틀이 눈에 들어왔다. 탄성이 나오는 예쁘고 알록달록한 광경에 학연이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면서 작은 종소리가 울렸다. 바로 누군가가 튀어나올 것 같았는데, 타닥타닥 정신없이 굴러가는 재봉틀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공기에는 얕은 커피향이 났다. 오늘 하루만 끓인 인스턴트 커피향이 아니라, 짙게 우러난 원두향이 건물과 옷에 짙게 배어있었다.

 

“실례합니다-”

 

빈 공간에 학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중하고 높은 듯 낮은 목소리라고 사람들은 그랬다. 진중하다는 평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진중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구에게나 가볍고, 날아갈 것 같은 사람보다는 누구에게나 진실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셔츠 더미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보다 한 뼘 정도 큰 키. 올라간 눈꼬리와 깊은 눈동자. 날카로운 콧매와 턱선은 확실히 제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껏 올려 세운 머리. 왼쪽 눈동자를 살짝 가린 갈색을 머금은 머리. 나른하고 여유로운 맹수 같았다. 그는 까만색 상자를 손에 한가득 쥐고 있었다. 자신과 눈을 마주치자 그는 상자를 저쪽 구석에 옮기고는 살짝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했다. 눈에 띄게 하얀 피부도 그에게 오묘한 분위기를 심어주었다. 그는 확실히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사람이었다. 색이 짙었다. 무얼 하든 그에게 거짓말 따위는 통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묘한 사람이었다.

 

“차 학연입니다. 부탁받은 의상 디자인만 보러 왔어요.”

 

“아, 학연씨.”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부드럽고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재봉틀 앞에 붙여 있던 작은 메모지를 떼어 학연에게 건넸다.

 

제가 입을 의상이 스케치되어 있었다. 어둡고 슬픈 이번 곡에 맞게, 까만색과 하얀색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손목에 까만색 끈이 내려온 옷이었다. 발목은 춤추다가 발 걸려 넘어질 것을 그도 알았는지, 발목에는 끈이 없었다. 세심한 배려였다. 허리춤에 달린 몇 어개의 하얀 끈. 디자인은 그만의 스타일이 확고했다. 제가 맞다고 생각한 디자인은 거침없이 선이 그려져 있었다. 그는 흥미로웠다. 워낙 여러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사람한테 흥미가 떨어진지 오래였는데, 이 사람은 저를 묘하게 자극했다.

 

“회사에서는 끈이 오히려 춤에 거슬린다고 빼라고 했지만, 잘 살리면 학연씨의 춤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줄 것 같아서 추가했어요. 만약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만든 뒤에 가위로 자르셔도 좋아요.”

 

학연은 메모지에 남은 연필 자국위에 조심히 제 손가락을 데었다. 아니, 그가 생각해준 제 모습대로 나온 그 디자인을 입고 싶었다.

 

“아니에요, 좋아요. 마음에 들어요.”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듯했다. 기분 탓이었을까. 전혀 웃을 것 같은 사람이 아니었는데, 웃음이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어린 나이에 데뷔한 혜성. 춤은 현대무용, 발레에서부터 보컬인 발라드, 팝송까지 막힘없이 소화해내어서 곧바로 대중이 주목한 사람. 얇은 몸에서 표현해내는 감정과 에너지는 실제로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대단했다. 그의 춤을 보면 반응은 여럿으로 갈렸다. 공연 처음부터 끝까지 울정도로 슬픈 공연이었다, 미소를 계속 지었던 공연이다. 야릇한 느낌이 드는 공연이었다. 그 많은 대중들은 같은 학연의 공연을 봐도 느끼는 감정과 평이 달랐다. 매일 공연이나 방송에 나올 때마다 불티나게 팔리는 그의 공연 티켓과 온갖 상을 휩쓸어가는 그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슬프고 아련한 무용을 춰서 학연이 순종적일거라는 사람들의 쉬운 오해와는 다르게, 그는 거침없었다.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굽히지 않았다. 그는 제 도덕에 어긋나는 일이면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인터넷에 제 소식과 제 의견을 제일 빨리 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솔직했다. 무언가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대중들의 표현을 조금만 빌리자면 “제일 사람다운 연예인” 이었다. 솔직하게 방송에서 웃고, 울 줄 알며, 감사함을 쉽게 전하고 알리는 사람이었다.

 

택운은 처음에는 작은 디자이너였다. 작게 시작한 옷 디자인들. 사람들에게 제 색깔에 맞는 옷을 입혀주고 싶다는 단순한 꿈이었다. 사람들의 감정의 색깔에 맞는 옷을 찾아주는 건 자신이 있었다. 그러다가 옷에 대해 뛰어난 평을 받아 어쩌다가 이 큰 중심가 가운데에 제 옷샵을 크게 차릴 수 있었다.

 

...큰 오산이었다. 제 감정을 채우지도 못했으면서.

 

학연이 저에게 옷을 부탁했을 때는 놀랐다. 항상 한 두 번씩 막연하게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었는데. 운이 제 편이었다. 조금 불안했던 것은 그를 향해서도 잘못된 감정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불안했다.

 

***

 

조금씩 자주 택운의 샵에 들렀다. 회사에서 유일하게 허락한, 언제든지 핑계를 대어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과 다른 면으로 무언가가 통했는데, 그게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는 제가 하는 작은 투정들을 귀 기울여 주었다. 그에게 가는 거리는 매일 더 향기로워졌다. 그에게 가는 시각이면, 저 옆 도너츠 상점에서의 달콤한 향이 더더욱 진해졌다. 오늘은 정신없이 일하고 있을 그에게 붉은 장미를 준비했다. 

 

그의 샵 앞에 서면 투명한 창문 사이로 무언가를 정신없이 그리고 여러 천 조각을 가져오느라 분주한 그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은 제 몸 사이즈를 잰 뒤에, 제 의상이 본격 작업에 들어간다. 회사에서는 너무 느린 일처리가 불만이라고 투덜거렸지만, 학연은 택운의 의상이 제일 마음에 든다고 완고하게 나갔다. 회사도 학연의 고집은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아서 마지못해 수락했다.

 

“택운씨-”

 

종소리와 같이 섞여 나오는 학연의 목소리에 택운이 고개를 돌렸다. 항상 택운은 옷을 입은 마네킹들 뒤로 꽤나 많은 상자들을 쌓아놓았다. 단색의 통일된 상자가 아니라, 색이 전부 달랐다. 겹치는 색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자주 그 여러 상자들에 무엇이 들었는지 기억하고 자주 열어보는 듯 했다. 먼지에 쌓인 상자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상자들에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택운의 표정이 경계로 변하는 바람에 그 상자들 옆에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붉은 장미를 들고 있는 학연을 보더니 택운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진짜 매혹적인 사람이었다. 저 웃는 듯 마는 듯한 저 얕은 미소가 얼마나 고귀해 보이는지 그는 전혀 모를 것이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품에 가득 장미 다발을 안겨주자 택운은 그 잘생긴 코를 잠시 장미더미에 묻었다. 

 

“잘 어울려요.”

 

“아,”

 

짙은 눈매 안에 감추어져 있는 속쌍꺼풀. 그는 여린 색깔이 어울리지 않았다. 확실한 빨간색은 그를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고마워요, 잘 놓아둘께요.”

 

“짙은 색이 잘 어울려요, 당신은.”

 

“짙은 색이요?”

 

택운이 조심스레 하얀 천 위에 장미 다발을 올려놓았다. 색깔과 소리라니. 묘하게 통하는 구석이 있어서 대화가 잘 통했다. 학연과 택운은 무언가를 표현하고, 아름다움을 쫓아가는 것에 대해 관심이 있는 건 같은 공통점이었다.

 

“가벼워 보이지 않아요. 무언가를 가득 담고 끌어안고 있어요, 당신은.”

 

“역시 예술을 하시는 분이라서 보는 눈이 다르시네요.”

 

택운이 옅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줄자를 꺼냈다. 사이즈를 재려는 듯 가볍게 양해를 구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학연은 똑바로 자세를 잡아서 일어섰다.

 

“진짜 말랐어요. 식사 좀 하고 다니세요.”

 

“시간이 별로 없기도 하고, 입맛도 요즘 없어요. 활동 전에는 이상하게 무엇을 먹든지 간에잘 소화시키지 못하더라고요.”

 

줄자는 제 어깨를 건너 왼팔에서 오른팔로 넘어갔다. 팔 길이를 각각 잰 그는 입에 물고 있던 연필을 빼서 숫자를 적었다. 그에게 측정되는 기분은 왠지 묘했다.

 

자신이 게이에 대해서 큰 생각을 가져본 적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진정성 있고 진실한 사람이라면, 성별 따위는 문제를 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자주했다. 택운에게 묘하게 호감이 갔다. 제 다리 길이, 상체 길이를 꾹 다문 입술로 말없이 재고 있는 그에게 계속 관심과 호기심이 커져갔다.

 

그는 저에게 아무 감정도 없을텐데, 혼자 막 앞서나간 기분이 들어서 그가 제 상체 길이를 잴 때, 부끄러워서 먼저 눈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제 음악을 다 들려주고 싶었다. 제가 숨겨왔고 마음속에서만 꿈꿨던 무용을 그의 앞에서 다 드러내고 싶었다. 그는 대중과 달리 제 단점까지도 감싸줄 것 같았다.

 

하얗고 긴 손가락이 제 짙은 머리칼을 파고들었다. 차가워 보이는 그의 외모와 분위기와는 다르게 그의 체온은 따뜻했다.

 

“옛 당신의 기사에서 당신이 진중함을 좋아한다고 들었어요.”

“숨기는 것을 제일 싫어해요.”

 

“숨기는 이유가 있다면요?”

 

그는 다 잰 줄자를 던지듯 앞 탁자에 내려놓았다. 제 머리칼에 파고들어가 있는 그의 손가락이 갑자기 위협으로 느껴졌다. 그의 눈빛은 지나치게 위험하고 음험했다.

 

“네?”

그 앞에서 한 발짝 물러섰다. 문득 그의 뒤에 잔뜩 전시되어 있는 여러 색의 상자들은 불길해 보였다. 너무 믿었나, 또.

 

“아니에요. 장미꽃 고마워요.”

 

휘어지게 올라가는 눈꼬리. 한 번도 올라가지도 않았는데, 처음으로 예쁘게 올라간 그의 눈꼬리와는 다르게 여전히 싸늘한 그의 입과 표정. 그에게서 뒤로 물러서며 너무 애정을 쏟았다고 후회했다. 당장 문을 열고 뛰쳐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아무리 봐도 여전히 짙었다. 전혀 장난 같지도, 저에게 가벼워보이지도 않았다. 당신은 대체 뭘까, 나에게서 뭘 원하고 기대하는 걸까.

 

“다음에도 다시 찾아올 꺼에요.”

 

다시 찾아온다는 말에 갑자기 커지는 그의 동공. 도망갈 거라고 생각했나. 아니. 전혀. 자신은 호기심을 숨긴 적도, 호감을 숨긴 적도 없으니까.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갔다. 

도너츠 향이 너무 달아서, 너무 달콤해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

 

택운에게서 전화가 왔다. 완성이 거의 다 되었다고 했다. 완성되기 전에 한 두어 번 정도 더 찾아갔었다. 그가 무섭고 불안해도, 제가 유일하게 한동안 믿음을 주었던 사람이기에 그에게 찾아갔다. 그 때의 그 서늘함은 눈에 띄지도 않았다. 다시 녹을 듯이 다정해지고, 진실되어 보였다. 그 때의 그는 무슨 의미였을까. 대신 그는 눈에 띄게 질문이 많아졌다.

 

“좋아하는 거 있어요?”

 

그의 뜬금없는 질문 공세는 항상 적응하기 힘들다고 느꼈다. 갑자기 옷을 짓다가도 훅 치고 들어온다. 그는 끈을 달고, 작고 세심한 무늬들을 제 의상에 박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래서 저는 제 공연이나 스케줄이 끝나면 자잘한 음식들을 사가지고 가서 그 앞에 앉아서 제 의상이 완성되는 작업을 구경했다. 그에게 준 장미 다발은 이제 말라가서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바스러질 것 같아서 제가 불안하다고 하자 택운은 저 선반 위에 높이 놓았다. 쉽게 망가지지 않을 자리였다.

 

“꽃 좋아해요. 저기 위에 놓인 장미꽃처럼 짙은 색을 머금은 그런 장미 꽃잎을 좋아해요.”

 

탁탁. 하얀색 새들이 무수하게 검은 천 위에 새겨졌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의 작은 탁자 위에는 재봉틀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여러 디자인들의 옷이 그려진 메모지. 하나 같이 간단한 낙서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공들인 스케치였다. 학연의 옷처럼 몇 번이나 지우고 고친 흔적들이 가득했다. 메모지 말고도 유리병들이 몇 개가 있었다. 유리병들에는 여러 약들이 차있었다. 다양했다. 상자처럼 여러 색깔의 알약들은 들은 양도 다양했다. 어디가 많이 아팠냐고 물어도 택운은 고개를 저으며 마치 그 오색의 상자들처럼 말을 교묘하게 피해갔다. 

 

“오늘만 만들면 이 옷 끝이죠?”

 

학연이 물었다. 택운의 눈동자가 다시 변했다. 또. 그때처럼. 다시 서늘함이 묻어나오는 그 눈빛이었다. 새겨지던 하얀 새의 날개가 빗겨나갔다. 학연이 잘못 새겨진 재봉틀을 말리려고 택운에게 입을 열었다.

 

“제 짙은 색을 조금만 덜어가줘요.”

 

“네?”

 

택운이 예전에 만들던 웨딩 드레스 레이스 더미로 제가 먼저 밀려서 파묻혔다. 자신이 항상 멀리서 떨려하면서 바라보았던 그의 붉은 입술이 제게 스며들었다. 그는 붉었다. 아주 짙고, 붉었다. 입술도, 색도, 성격도, 분위기도 전부 다.

 

그래서 저에게 덜어줄 색은 넘고도 찼다.

 

***

 

그는 까만색 상자에 제 의상을 담아주었다. 저기 뒤에 놓인 상자들과는 또 다른 색이었다. 제일 흔한 까만색이지만, 저 상자들 중에 그 무엇도 까만색을 담고 있지 않았다. 무슨 생각으로 저에게 까만색을 선물했을까.

 

택운은 저와 정식으로 연애하고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다. 제가 공연이 끝나면 여전히 자잘한 음식들을 사들고 갔고, 이제는 붉은 장미 다발도 자주 사갔다. 그래서 그의 샵에는 이제는 커피향 말고도 항상 어제 사놓았던 생생한 장미향도 섞여서 났다. 

 

그의 색은 너무 짙어서 감당하기 힘들었다. 제가 가끔씩 그를 밀어낼 때마다 너무 서늘해지고 차가워져서 무서웠다. 조금만 제가 택운에게서 멀어지면 택운은 곧바로 자신을 잡아서 제 품에 가두었다. 그의 짙은 색은 집착이었을까. 그래서 그런 그를 위해서 저는 매일 제가 그의 곁에 머물 것이라고 거듭 강조시키고 속삭여주었다. 

 

“옆에 있을꺼에요. 계속. 약속할께요.”

 

매일 그렇게 속삭여주면 그는 제 손에 얼굴을 파묻고 잔뜩 숨을 들이키고는 다시 잠시나마 정상으로 돌아왔다. 

 

택운은 저가 만들어 준 그 의상을 입고 온 학연을 제일 좋아했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색으로만 만들어 준 것이라며 그것을 입고 왔을 때에는 그나마 집착이 덜했다.

 

택운이 제 사랑을 깊이 갈구하는 거 같아, 그의 품에 깊이 안기면 그의 무슨 기억을 건드린 건지 밀쳐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말이 별로 없었고, 그 침묵은 저를 괴롭게 했다. 어떻게든 참고 견디려고 해도, 뼛속 깊이 더 외로워졌다. 

 

결국 못 참고, 아침 일찍 그의 아직 열리지 않은 옷샵 현관문 사이에 붉은 편지지를 끼어두었다. 힘들다, 괴롭다, 이별을 뜻하는 편지였다.

 

***

 

문자가 왔다. 제발, 마지막으로 만나달라는 간곡한 내용이었다. 문자에는 집착 대신 안타까움과 슬픔으로만 가득 찬 문자라서 학연의 마음을 계속 건드렸다. 오늘 저녁에 제발 찾아와달라는 간곡한 부탁만 들어달라는 내용이었다. 

 

오늘 밤만, 딱 오늘 밤만 만나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도 그의 얼굴을 보고 작별을 고해야지 이 묘하게 찝찝한 기분도 가실 것 같았다. 그에게 찾아가기 위해서 공연 의상을 찾았다. 공연이 끝난지 몇 달이 다 되어가는데도 정말 그를 보기 위해 꾸준히 입었던 옷이었다. 택운에게는 티를 낸 적이 별로 없었지만, 그가 만들어준 의상은 여전히 제가 지독히도 아끼는 옷이었다. 하얀 새들이 검은색 배경에서 날라가는 그 옷은 제가 제일 아꼈다. 그와의 작별도 이 옷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 같았다.

 

그를 찾아가는 거리에서는 더 이상 도너츠 향기가 나지 않았다. 옛날에는 진짜 중독될 정도로 단 향이었는데, 이제는 겨울에 찬 공기만 느껴졌다. 따뜻한 봄에 그를 만났었는데.

 

“보고 싶었어요, 마지막으로라도.”

 

택운은 처음으로 옷샵 앞에서 나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얀 코트를 입고는, 계속 제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붉은 장미 다발이 들려 있었다. 항상 제가 사가지고 갔던 그 장미는 이제 그의 손에 있었다. 제 손은 정말 완벽하게 비어 있었다.

 

그는 옷샵을 열었고, 학연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를 따라갔다. 택운은 제 손목에 길게 딸린 끈을 만지작거렸다. 잠시 자신을 바라보다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이거, 먹어요. 먹고 이야기 해요.”

 

매일 맡았던 도너츠 향. 붉은 크랜베리 도너츠. 왠지 모르게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빨간색이었다. 제 인생에서의 마지막 빨간색이라고 믿고 싶었다.

 

“...마지막 빨간색이에요, 진짜로.”

 

마음을 읽은 건가? 무슨 자신감인지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저에게 잘린 한 조각을 권했다. 그는 탁자 위에 장미꽃 다발을 올려놓았다. 온통 붉은색의 향연이었다.

 

하얀 설탕 파우더가 가득 뿌려진 도너츠의 겉면과는 다르게 진득한 잼이 입안에 퍼졌다. 마지막 붉은색이라던 택운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입에서 붉은 것이 쏟아져 나오는 게 마지막 기억으로 암전이 되었기 때문이다.

 

***

 

3월 2일

 

학연을 만났다. 동그란 눈은 매우 순수하고 깨끗했다. 최고의 의상을 선물해주고 싶다. 그는 나를 특이한 눈으로 바라본다. 나를 이해한다는 듯한 눈을 품고 있다. 나를 가늠하려고 노력하고, 나에게 호기심을 보인다. 지나치게 솔직하다.

 

3월 27일

 

솔직한 것을 좋아한다는 그에게, 숨기는 이유가 있다면 어떡할꺼냐고 물었다. 그에게 분노를 표현하고 다시 미치고 나니, 정신이 온전하지가 않아서 지금도 계속 글씨가 제대로 써지지 않는다. 그는 나를 버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를 믿었던 내가 바보스러워지는 순간이다. 너도 다른 사람들과 같아. 내가 미치면 너도 도망가겠지. 그러면 나를 이해하려고 했던 그 눈을 보관하려고 했다. 그 눈은 계속 바라볼만한 아름다움의 가치가 있을 것 같았다. 나보고 짙다고 했다. 내가 무엇이 짙은지까지는 파악하지 못하겠지만 나에 대해 그 정도로 알아낸 너를 칭찬하고 싶었다. 나가려는 그를 비웃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뱉었다. 너는 무슨 자신감일까. 너는 왜 그리 당당할까. 잠시 미뤄야겠다.

 

4월 7일 

 

그에게 무엇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마지막 배려는 원래 모두에게 공정히 돌아갈 것이니까 그에게 물었다. 그는 붉은 장미 꽃잎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에게 선물한 건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거였다. 검은색 배경에 무수히 새를 수놓아주었다. 그는 가벼운 것이 싫다고 했지만, 내 옆에 머무를 때에는 그 가벼움을 그리워할까봐. 그래서 수놓아주었다. 그는 바스러질까봐 불안해하는 그 꽃다발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꽃다발을 그래, 동정하고 있었다. 아니, 날 먼저 동정해줘. 날 먼저 아껴주고 내 이 이상한 감정을 덜어가줘. 오늘은 충분히 충동적이었다.

 

10월 5일

 

너무 오래 그에게 머물렀다. 그는 계속 빈 내 공간을 파고들려고 애썼다. 고의적인지, 아니면 의도치 않게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불안한 면을 눈치챘는지, 계속 저에게 영원히 있는다고, 머무른다는 거짓말을 속삭인다. 믿으면 안된다는 것을 아는데도 계속 믿게 될까봐 무섭고 두렵다. 난 너를 사랑하지 않아. 그리고 네가 매일 놓아둔 그 장미 꽃잎을 떼면서 하염없이 장미 다발을 끌어안고 운다. 장미 가시가 나에게 파고들어 가득 흉터와 상처를 남긴다. 꽃잎을 따다 그저 하염없이 운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매일 내 새까맣게 타들어간 심장이 터져도 난 너를 사랑하지 않아. 까만 상자를 네가 매일 보고 나를 먼저 알아주면 좋겠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11월 10일

 

헤어지자는 너의 편지. 너의 편지를 읽고 오랜 시간동안 옷샵을 부셨다. 너랑 앉아 있던 의자와 너의 의상에 썼던 옷감들, 메모지와 온갖 컵들과 장미 다발을 다 부수고 바스러트리고 나서 내 심장에는 화만 남을 줄 알았다. 그런데 슬픈 감정이 밀고 들어왔다. 정말 오랜 시간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눈물과 울음이었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렇게 믿고 싶다. 넌 나를 떠나가면 안된다. 불완전한 내 색을 덜어준다고 먼저 약속했던 건 너였다. 너에게 미안함을 느끼지는 않는다. 밉고 화난다. 너를 죽여서 욕조에 뉘었다. 너의 주변에 생기를 머금은 장미 꽃잎을 뿌렸다. 그리고 오랜만에 칼을 꺼내어 내가 제일 아끼는 너의 부분을 찾으려 애썼다. 다른 사람들은 다 쉬웠는데, 너는 그렇지 않다. 너무 아름답고 간직하고 싶은 부분이 많아서.

 

심장을 꺼냈다. 새까맣게 타들어간 내 심장과는 달리 너의 것은 붉은색이었다. 유리병 안에 담가서 오랫동안 내가 끌어안았다. 

 

멀어지지마, 우리.

 

***

 

사랑했다, 아꼈었다, 그 뿐이다.

 

 

 

 

 

누가 그를 하찮은 형이라 했는가. by. 익명
Salvatio by. D. 에르타
꽃잎놀이 by. 허브
사랑의 죽음 by. 춘몽
소년과 소년의 청춘 by. 청
Our Happy Ending by. 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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