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xx leo & n rps fanpage webzine

 

 

 

 

 

Salvatio (부제 : 말로末路의 소망)

정택운 X 차학연

Written By. D. 에르타

 

 

 

 

 

*

 

 

 

 신이시여, 청춘을 불쌍히 여기소서.

 

 

 

*

 

 

 

 “죽지 마.”

 “…”

 “죽어도 내가 있을 때 죽어.”

 

 

 

*

 

 

 

 조용히 떠나는 발소리는 혼자였다.

 

 

 

*

 

 

 

 “씨발,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정적이 흐르고 있었던 방이 재환이 제 가슴에 줄줄이 달린 훈장을 집어던지는 소리로 가득 찼다. 날이 선 단면이 바닥을 할퀴는 파열음이 학연의 귓전을 때렸다. 재환의 형형한 눈빛이 학연을 향했다. 대답을 종용하는 시선이었지만 학연은 아무 말도 않고 그저 바닥만 볼 뿐이었다. 일말의 분노조차 담겨있지 않은 학연의 얼굴에 재환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한 나라 반란군 수장 급이나 되는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없어지더니, 지금은 왕실 대대장? 이게 제정신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재환이 형.”

 “이미 반란군에 들어오기 전부터 변절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그렇지 않으면 언질도 없이 떠날 리가 없지. 이제 우리가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라고. 왕실 놈들 얼굴을 보자마자 그 자식이 모든 걸 다 불었을 테니까!”

 “이재환!”

 

 

 

 회의실 테이블을 앞에 두고 앉아 있던 홍빈이 조용히 그를 진정시키려 들었지만 오히려 화만 돋운 셈이었다. 금방이라도 잿더미가 되어버릴 것처럼 타오르는 눈을 한 재환이 저를 부르는 학연의 목소리에 번뜩 고개를 돌렸다.

 

 

 

 "형은 이 상황에 화도 안 나나 봐? 그 새끼 배신할 걸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학연의 얼굴이 대번 굳었다. 그런 학연의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재환의 날카로운 혀는 멈출 줄을 모르고 학연을 해하려 움직였다.

 

 

 

 "형도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긴 한 거야?"

 

 

 

 홍빈이 더 이상 가만있지 못하고 재환을 막으려 일어섰지만 학연이 문 발치로 돌아선 것이 더 빨랐다. 기계처럼 칼같은 속도로 옮기는 발걸음은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단호했다. 쾅 닫히는 문틈 사이로 차갑게 분노한 학연의 눈이 빛났다 사라졌다. 그것을 마주한 재환은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이미 늦은 지 오래였다.

 

 

 

*

 

 

 

 두 사람이 꿈꾸는 이상은 언제나 하나였고 그 외의 것은 상상해 본 적이 없던 시절이었다. 함께 반란군이 되자고 맹세했을 때에도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차학연, 정택운. 입단서에 자기 이름 세 자를 피로 흘려 써 넣을 때에도. 서로를 그저 친구라고 치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입술을 부비고 살을 맞대게 된 그 때에도. 모든 것은 치기 어린 젊음이라는 명분 하에 용서되었다. 

 

 

 

 이제는 모두 허사가 되어 버린 일이었지만. 학연은 담배를 물었다. 뭐든지 철저한 그의 성격답게 정갈하게 말려 있는 끝에 불을 당겨 붙이며 학연은 생각에 취한 듯 빠져들었다.

 

 

 

 무용수를 꿈꾸었었다. 적진에 그림자처럼 스며들어 단번에 목을 베어낸다며, 세간에 떠도는 학연의 소문을 생각하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학연이 임무를 처리하는 것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그가 무용수의 꿈을 품었음을 대번에 알았다. 파도처럼 넘실대는 몸, 그 유려한 몸짓을 보면 모를 수가 없으리라.

 

 

 

 반란군이 되는 순간부터 무용을 할 시도조차 허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학연은 알고 있었다. 학연은 절망하지 않았다. 좌절하지도 않았다. 마음 속에서 끓어오르는 괴로움을 어쩔 수 없는 날이면 택운이 연주하는 피아노에 맞춰 춤을 추었다. 택운은 줄곧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 했었다. 두 사람은 뭐든 이룰 수 있을 것처럼 춤을 추고 건반을 두드렸다. 하지만 뭐든 그럴 수는 없다는 걸 더 잘 알고 있었다. 좌절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은 건 그래서였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이 없었다.

 

 

 

 눈을 내리깔고 깊게 한 모금을 들이키는 학연의 옆으로 발자국이 다가섰다. 학연은 부러 아는 체 하지 않았다. 상대가 어떤 말을 할지 아는 까닭이었다. 형, 재환이가 말을, 낮게 깔리는 목소리를 손을 내저어 막았다.

 

 

 

 됐어. 여전히 제 쪽으로 돌아오지 않은 고개에 홍빈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를 가장 오래 알았다 자신할 수 있는 홍빈조차도 이런 순간에는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홍빈이 입을 닫자 침묵만이 어둠처럼 짙게 깔렸다.

 

 

 

 "주둔지 근처의 병력을 늘려야 해."

 

 

 

 학연이 대뜸 말했다. 

 

 

 

 "왕실에 강력한 병력, 아니 우리 쪽 고위 간부였던 사람이 추가됐으니 정보가 털리는 건 일도 아니겠지. 지금 당장 모든 암호랑 중요 문서들 있는 위치 바꿔."

 "알겠습니다."

 

 

 

 홍빈은 학연의 마음이 정리되었는지 어쩐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홍빈에게로 돌아선 얼굴의 눈빛으로 깨달은 것은 하나 있었다. 정택운이 변절했든 아니든, 학연은 변치 않는 반란군의 수장이라는 것. 흔들리지 않는 눈을 마주한 홍빈이 고개를 숙이고는 옥상을 떠났다. 지금으로서는 학연의 지시를 따르는 일이 최선이었다.

 

 

 

 학연은 다시 혼자 남아, 택운의 변절을 곱씹었다. 본래도 한 입으로 두 말은 안 하는 사람이니 거짓으로 왕실에 들어갔을 리는 없다. 어느 모로 보아도 본인 의지의 작용이었다. 다른 핑계를 댈 수 없을 만큼 명확했다.

 

 

 

 학연은 몇 번이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정택운은 반란군을 거부하고 왕실에 들어간 변절자이다. 수장으로서 절대로 그를 용서해서는 안 된다. 정택운을 마주치게 된다면 그가 무슨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그를,

 

 

 

 모른 척 해야만 한다. 

 

 

 

 죽여야만 한다.

 

 

 

 벌어진 입술 새로 한숨이 샜다. 시린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어깨를 노리고 들어오는 칼날을 아슬하게 피했다. 입이 바짝 말랐다. 학연의 등 뒤로 쌓인, 적군인지 아군인지 모를 사람들이 수도 없이 피의 산을 이룬 채 쌓여 있었다. 눈앞에서는 적군이 확실해 보이는 사람들이 바다처럼 넘실댔다. 죽고 다친 채로 계속 싸워나가야 하는 반란군과 달리, 왕실은 제 쪽 인원이 줄면 바로 새 인원을 들여보냈다. 이미 전세는 판가름났다.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지 않기 위해 도망쳐도 모자라는 상황이었다.

 

 

 

 택운이 왕실 근위대가 되었다는 소문이 사실로 확인된 지 몇 주가 되지도 않아, 왕실 연합은 반란군의 숨통을 옥죄기 위해 착실히 움직였다. 암호와 기지 위치 따위는 바꿀 때마다 하릴없이 털렸다. 기지를 옮기기도 전에 이미 포진해 있는 연합군을 마주칠 정도였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보다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맞았다. 그래서 수장 자리를 홍빈에게 넘긴 것이 아닌가. 몇몇 간부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인수인계를 하는 짧은 시간에도 홍빈은 별다른 질문이 없었다. 그저 불안한 표정을 해 보일 뿐이었다. 악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을 때를 보는 종류의 불안이었다. 상상에만 그쳤던 최악의 사태가 도래했음을 직감하는, 그런.

 

 

 

 해서 현재의 수장은 홍빈이었지만, 최전방에 선 것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학연이었다. 수장이 바뀌었음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홍빈은 학연의 의중을 간파하고는 굳이 불만을 숨기려고 들지 않았다. 학연은 항상 제 절친한 전우이자 동생인 홍빈이 무엇을 속상해 하고 있는지 알았다. 학연을 지킬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는 것. 내색은 않았지만 그 마음이 고마웠다. 그래서 지켜야 했다. 

 

 

 

 폐부를 타고 벅차오르는 숨을 토하며 학연은 남은 인원을 확인했다. 더는 미룰 수 없었다. 학연이 홍빈에게 작게 신호했다.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홍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학연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다시 칼을 맞대고 베어내고, 맞대고 베어내는 똑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반란군이 도망친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뺨으로 피가 쏟아졌다. 다 갔을까, 부러 잽싸게 고개를 틀어 약속한 지점을 확인하는 사이 목덜미가 아찔하게 아팠다. 정신이 아득하게 흐려졌다. 조금씩 좁아지는 시야에는 점처럼 조그맣게 보이는 제 동료들이 계속해서 멀어지고 있었다.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내내 암전이었다.

 

 

 

*

 

 

 

 그곳엔 네가 있을까.

 

 

 

*

 

 

 

 택운은 성큼성큼 취조실로 향했다. 냉기가 서린 무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미칠 것만 같았다. 반란군 하나가 잡혀왔다는 소식에 당연히 홍빈이나 재환이리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명단에 올라 있는 이름은 명백히 차학연이었다. 그제야 고작 한 명이 잡힌 것일 뿐인데도 왕실 내부가 들썩였던 이유가 짐작이 갔다. 그 한 명이 다름 아닌 반란군의 수장이었으므로.

 

 

 

 그리고 정택운은 차학연을 취조해야만 한다. 걸을 때마다 출렁이는 채찍의 무게가 납덩이보다도 무거웠다. 택운이 왕실로 온 뒤의 첫 만남이었다. 택운은 학연이 어떤 눈을 하고 있을지, 어떤 식으로 저를 대할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택운은 호흡을 가다듬고서는 두꺼운 문을 열어젖혔다. 묶여 있는 한 인영에 저절로 눈이 갔다. 호흡을 가다듬은 것이 순식간에 무색해졌다. 피를 뒤집어쓴 채 조용히 저를 응시하고 있는,

 

 

 

 차학연.

 

 

 

 학연은 들었을 리 없는 택운의 등장에도 모르는 사람 보듯 동요가 없었다. 택운이 학연 앞으로 이동하는 내내, 제 신문관을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택운은 숨이 막혔다. 제가 예상했던 시나리오에 이런 것이 있었던가. 예상했었다면 이렇게 힘겹지 않았을까. 대답은 전부 다 ‘아니’였다.

 

 

 

 변한 건 많지 않아보였다. 조금 더 마른 것뿐이었다. 둥글게 떨어지던 뺨을 본 적이 언제였더라. 살짝 숙이는 턱이 벨 듯이 날카로웠다. 하지만 무언가 정말 큰 변화가 일어난 것만 같았다. 그게 뭘까. 어렵지 않게 택운은 알아차렸다. 오랜만에 만나는 차학연은 먼 옛날 저와 차학연이 가보고 싶어 했던 북쪽 나라의 빙산 같았다. 차갑고 무섭고 눈이 시릴 듯 아름답고. 차학연의 몸 어디에서라도 그렇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택운은 짐짓 엄한 척 알아내야 할 것들이 줄줄이 적힌 목록에 눈을 고정했다. 어서 시작하지 않으면 다른 말을 쏟아낼까봐 두려워서였다.

 

 

 

 “네가 반란군 수장이라지.”

 

 

 

 들어오지 않는 검은 글자들 위로 올라간 입꼬리가 보였다. 차학연이 웃고 있었다. 학연의 곁에 있던 내내 본 적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런 류의 웃음이었다. 터진 입술 끝에 냉기가 돌았다.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택운은 무던해 보이기 위해 애쓰며 부러 고개를 들어 학연의 눈을 마주쳤다. 제 눈에도 학연의 것과 같은 무표정함, 그러니까 ‘아무렇지 않음’이 들어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그건 택운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 눈에는 아마 죄책감과 두려움, 뻔뻔함 따위가 죄 뒤섞여 있을 거였다.

 

 

 

 “나이와 출신지를 대라.”

 “그것도,”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곧은 시선은 함부로 오가지 않았다. 택운은 이제 서 있기도 힘이 들었다. 온 중력이 저에게만 향해 있는 듯 했다. 변절의 죗값이 이리도 무거웠었던가. 애초에 변절이라 하기에도 무색한 것을. 택운이 질문을 이었다.

 

 

 

 “네 동료들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

 “모두 널 떠난 것은 알고 있는가.”

 

 

 

 이미 답을 아는 질문의 연속이었다. 학연을 제외한 반란군이 모두 도망쳐버렸다는 소식을 들은 택운은 사건의 전말을 파악한 지 오래였다. 이홍빈이 차학연을 두고 갈 리가 없다. 목숨을 걸어가며 서로를 지킨 사이다. 분명 나머지를 지키기 위한 학연의 생각에서 비롯된 상황일 테다. 한 마디로 하면 지금 하는 일은,

 

 

 

 전부 의미없는 일이다.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기도 전에 학연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식상한 질문 그만하세요.”

 “…”

 “전 대대장님 업적을 잘 압니다.”

 “…연아.”

 “대대장이 되시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 반란군을 속이셨는지요.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가라앉은 눈에 조소가 일었다. 순식간에 수치가 몰아닥쳤다. 온갖 감정에 휘둘려 바보같이 떨리는, 택운에 손에 들린 기다란 채찍을 본 학연은 독설을 뱉기에 거침이 없었다.

 

 

 

 “바보같이 굴지 마시고 고르십시오. 죽이든 살리든 하나만 하시란 말입니다. 손에 드신 걸 보니 무얼 선택하셨는지는 잘 알겠습니다만.”

 “차학연,”

 “뭐하십니까, 얼른 눈앞에 있는 반란군 수장을 때려죽이지 않으시고.”

 

 

 

 내리꽂히는 독설이 아팠다. 얼기설기 꿰맨 상처를 다시 잡아 벌리는 것만 같았다. 학연이 행한 유일한 오점이 오직 저임에도 불구하고, 택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수치에 어쩔 줄을 몰랐다.

 

 

 

 “얼른 결정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저 같은 사람이 대대장님 소중한 시간을 이렇게 뺏어도 되려나.” 

 “…연아.” 

 “너한테 허락한 이름이 아니야.”

 

 

 

 내게 지금 뱉은 모든 말이 모두 사실이 아니라 말해주면 안 될까. 거짓으로라도 살려달라고, 모든 것을 말하겠다고 해 주면 안 될까. 깨문 입술이 아릿하다 못해 감각이 없어질 때쯤에야 택운은 풍랑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니, 가라앉히려고 했다.

 

 

 

 “왜요, 이번에는 왕실 쪽이 싫증이 나십니까?”

 

 

 

 채찍이 한 차례 크게 원을 그리고 나서야 번뜩 정신이 드는 것이었다. 차학연의 몸에 부딪힌 그것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제자리에 돌아오고 나서야. 정택운이 하나뿐인 연인인 차학연에게 채찍을 휘둘렀을 때, 정택운에 머릿속에 남은 것은 오직 하나였다. 순간 학연의 얼굴을 스쳐지나간 표정. 신음 하나 나오지 않는 다문 입매와 내리깔린 눈은, 분명 체념이었다. 너를 믿을 수 없었고, 그래서 지금까지 그러지 않았다는.

 

 

 

 그 후의 기억 역시 선명하지 않았다. 눈물로 번진 세상처럼 흐릿했다. 그저 도망치듯 하는 두 다리로 신문실을 빠져나왔을 따름이었다. 동료다 상관이다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서 무려 반란군의 수장을 고문했다며 떠들어댔다. 택운은 모든 게 꿈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손에 남은 채찍의 묵직함만은, 차학연의 몸에 남을 자국처럼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것이었다.

 

 

 

*

 

 

 

 반란군의 수장에게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 택운의 실책은 너그러이 용서되었다. 왕실에서의 첫 신문인데다 무려 수장을 통해 무엇을 알아낸다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근위대장은 학연의 몸에 길게 남은 상흔으로 만족한 모양이었다. 

 

 

 

 학연은 신문을 전문으로 하는 대대장에게로 옮겨질 거라고 했다. 택운도 아는 사람이었다. 허세와 열등감에 찌들어 남을 고통주기를 즐기는 포악한 류의 사람. 그가 학연의 신문을 맡는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학연은 적국의 사람이 보는 앞에서 누구보다도 비참하고 잔혹하게 죽을 것이다. 

 

 

 

 택운이 얼른 제가 신문을 맡겠다 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택운은 제가 뭘 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차학연의 이름 옆에는 정택운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이 올라간 지 오래였고, 정택운은 다시는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차학연의 시선을 마주할 수 없을 거였다. 설령 그 시선이 경멸과 조롱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근위대장과 마주하고 있었던 그 시간에 자신이 바꿀 수 있던 건 무엇이었을까, 택운은 곰곰이 되짚어보았다. 택운이 학연의 신문을 맡겠다 말한 요청이 받아들여졌다면,

 

 

 

 학연에게 채찍을 들 수 있을까.

 

 

 

 애초에 그 얼굴을 바라볼 수 있기는 할까. 이미 학연을 해친 자신이다. 다시 그 끔찍한 신문실에 들어가 채찍을 휘두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당연히 채찍을 손에 쥐지도 못할 테고, 신문은 저번처럼 어영부영 끝날 것이다. 학연이 반란군에 대해 입도 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뻔했고, 계속 성과를 내지 못하는 택운을 대신해 누군가가 학연의 신문을 맡게 될 것이다.

 

 

 

 결국 지금과 달라질 게 없다는 말이다. 택운은 방문을 걷어찼다. 처음부터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주 처음부터.

 

 

 

*

 

 

 

 “이번 한 번만 모두 못 본 척 해 주마.”

 “…!”

 “그 말은 이제는 더 이상 봐 줄 수 없다는 얘기다. 그곳에서의 의무도 모두 끝났으니 짐 싸서 왕실로 복귀해. 오늘 새벽까지 도착하지 않으면 안 돼.”

 “하지만 아버지,”

 “오늘 복귀하는 정황이 보고되지 않으면 그 즉시 반란군을 급습한다. 내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결말은 바뀔 수가 없었다. 아주 처음부터.

 

 

 

*

 

 

 

 시간이 덧없이 흘렀다. 택운은 기계처럼 하루하루를 살았다. 기계처럼 밥을 먹고, 훈련을 하고, 잠을 잤다. 반란군의 수장이 잡혔으니 반란군을 찾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다. 물론 택운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상부의 명령이니까. 헛웃음이 나왔다. 생각도 기계가 되어 가는 건가. 

 

 

 

 간간히 학연의 소식이 들렸다. 들으려 하지 않아도 들렸다. 녀석은 제가 오늘 뭘 했는지에 대해 죄 떠벌려 댔다. 오늘은 어디를 어떻게 때렸다, 뭘 어떻게 했다, 하는. 그걸 듣고 있던 누군가가 그래서 뭐라도 알아냈는지를 물으면 여지없이 우물쭈물했다. 정택운이 아는 차학연은 그런 사람이었다. 나긋하고 유순해 보이는 눈을 하고서는, 믿을 만하지 않다 싶으면 단칼에 선을 그었다. ‘실토한다’와 ‘차학연’이라니. 그게 애초에 공존할 수 있는 단어란 말인가.

 

 

 

 녀석의 말 안에서 차학연은 계속해서 망가져 갔다. 말만 들으면 곧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였다. 그나마 얼굴이 멀쩡한 것이 다행일까. 실은 꽤나 반반한 얼굴이라며 손은 나중에 대겠다던 녀석의 불순한 의도 때문임을 택운은 알았다. 주먹이 더없이 꽉 쥐어졌다. 정택운은 차학연에게만 반응한다. 회빛으로 덧칠된 택운의 인생에서 단 하나의 색채인 차학연이다. 그런 차학연과 같은 공기를 마시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무력감이 치가 떨리게 싫었다.

 

 

 

 갖은 노력을 다 했지만 신문관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했다. 심지어 학연을 보러 가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왕실 규율 상 신문은 폐쇄된 곳에서 진행되었기에 택운은 학연의 머리카락조차 볼 수 없었다. 그게 너무 화가 났다. 뒷모습이라도 볼 수 있기를 그리고 또 그리면서도, 마음 한 켠에서는 그런 상처 입은 학연의 모습을 보는 상상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왕국에서의 정택운은 자꾸만 모순적이었다.

 

 

 

 며칠 전 동료들이 우연히 하는 대화를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밥을 먹다 말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물었다. 반란군 수장은 어떤 소원을 빌까.

 

 

 

 소원이라 함은 ‘말로末路의 소망’을 말하는 것일 테다. 고초를 시작한 지 열흘째 되는 날, 왕국이 고초를 겪는 도중 아무것도 실토하지 않은 죄인의 강직함을 기려 베푸는 상. 상을 받는 죄인은 자신의 죄와 관련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어떤 소원이라도 빌 수 있으며, 그 소원은 왕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죄인의 사형은 소원을 말하고 난 사흘 내에 집행된다.

 

 

 

 그러나 독하다고 소문이 나 있는 왕국의 신문 탓에 말로의 소망을 하사받는 죄인은 요 몇 년간 없는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나름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은 학연이 심지가 굳기로 정평이 나 있기 때문이리라. 고민하던 동료가 이내 입을 열었다.

 

 

 

 “엄청 파격적인 걸 말하지 않을까. 누굴 없애주세요, 같은.”

 

 

 

 택운 역시 생각에 잠겼다. 소멸이라. 지금 학연에게는 지켜야 할 가족도, 친구도 없었다. 적이 된 애인을 포함해서.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실망과 체념으로 죽어있던 두 눈.

 

 

 

 차학연은 정택운의 소멸을 바라게 될까. 택운은 눈을 감았다. 기나긴 밤이 지나갈 생각을 않았다.

 

*

 

 

 

 “정택운 대대장님.”

 “무슨 일이지?”

 “수감자 차학연의 ‘말로의 소망’ 집행 예정으로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내용은?”

 

 

 

 “10분간의 면회를 요청했습니다.”

 

 

 

 고작 그게 다였나? 재차 물어보기에는 병사의 눈빛이 지나치게 진실해, 택운은 별다른 말없이 침소를 나섰다.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부유했다. 차학연이 마지막으로 원하는 것이 자신과의 만남이다. 택운은 이 일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는 맹세할 수 있었다. 학연이 무엇을 원하든, 그것이 제 죽음이든 고통이든, 이루어지게 하리라. 제 가슴팍에 칼을 꽂아 넣으라 한다면 망설임 없이 그렇게 하리라. 보란 듯 허리춤에 찬 단도가 그것을 증명했다.

 

 

 

 신문실 문이 열렸다. 틈으로 새어나오는 혈향이 짙었다. 택운은 천천히 다가가며 학연을 살펴보았다. 학연의 피와 섞인 물이 택운의 발치에까지 흐르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부터 쏟았는지 간간히 떨리는 몸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택운이 학연의 가까이에 설 때까지 학연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촘촘한 속눈썹이 연신 파르르 떨렸다. 가슴이 내던져지듯 아파왔다.

 

 

 

 학연의 위로 택운의 그림자가 지자 학연은 조심스레 눈을 떴다. 택운은 숨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택운아.”

 

 

 

 학연이 열흘 만에 택운을 처음 보고 한 말은, 그 다정함이란, 먼 옛날과 다르지 않았기에 마음이 울컥 차올랐다. 냉기로 번들거렸던 눈동자가 봄눈 녹은 듯 따뜻했다. 제가 보고 있는 것이 헛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필요도 없었다. 택운은 황급히 학연의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맞잡았다. 학연이 금방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 불안해서였다. 묶인 두 손을 쥐어주며 학연이 옅게 미소 지었다.

 

 

 

 “…학연아,”

 “안 올 줄 알았는데…”

 와 줬구나. 택운의 손을 꼭 쥔 채로 학연이 말을 이었다.

 

 

 

 “다… 진심 아니었어. 미안해.”

 

 

 

 택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려앉는 말이 마치 선물 같았다. 놀라 말을 잇지 못하는 택운의 머리칼을, 학연이 가만가만 쓸어주었다. 묶인 손이 적잖이 불편할 텐데도 계속해서.

 

 

 

 택운은 구원을 바라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학연의 손길을 느꼈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밖에는 수십의 병사가 있었고, 학연의 피는 멎지 않고 있었지만. 안일한 마음이 들었다. 그냥 모든 책임감과 죄책감 없이, 이 시간만을 떠돌고 싶은. 그래서 학연이 제 마지막 소망에 대해 말문을 열려 할 때에도 택운은 간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 달콤함의 끝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학연의 입술은 야속하게 움직였다.

 “실은, 내 말로의 소망을 들어주길 바라서, 이렇게 보자고 했어.”

 “학연아, 말, 말하지 않으면 안 될까.”

 “꼭 지켜줬으면 해.”

 “학연아, 제발.”

 “나는 네가 아주, 아주 긴 시간이 지난 후에 나한테 왔으면 좋겠어.” 

 

 

 

 허리춤에 찬 단도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너무 늦었다. 택운이 알아차릴 새도 없이 이미 단도는 학연의 가슴에 날을 박고 있었다. 안 돼!!!!! 택운이 절규하며 고집스레 단도를 밀어 넣는 손을 붙잡았다. 붉게 물드는 택운의 손이 하릴없이 떨렸다. 

 

 

 

 “…고백할 게 있어.”

 학연아, 학연아, 바보처럼 제 이름을 부르며 떠는 연인의 손을 어루만지며 학연이 입을 열었다. 채 말을 잇기도 전에 쓰러지는 학연을 택운이 안아들었다. 입술 새로 자꾸만 힉힉거리는 울음이 샜다. 

 

 

 

 “그날 밤,”

 “제발, 제발 이러지마.”

 “네가 떠날 걸 알고 있었어.”

 “…!”

 “너랑… 네 아버지가 하는 말, 들었거든.”

 

 

 

 그래도… 난 너 원망 안 해. 말을 뱉는 호흡이 거칠었다. 학연의 안색은 무섭도록 빠르게 창백해져 갔다. 두려움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학연이 죽어가는 것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바다 속의 모래를 쥐듯이, 학연의 목숨은 너무나도 쉽게 저를 빠져나갔다. 학연이 잘게 기침하며 피를 뱉었다.

 

 

 

 “학연아, 차학연. 학연아 제발.”

 

 

 

 우리 꼭 만나자. 학연이 입꼬리를 끌어올려 천천히 미소 지었다. 으슬으슬 추워오는 것이 느껴졌다. 귀로는 알 수 없는 이명이 커지고 있었다. 때가 되었구나, 천천히 감기는 눈꺼풀 사이로 택운의 얼굴이 스쳤다. 제가 더 아픈 얼굴을 하고,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하고, 대답해주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학연의 이름을 부르는 택운의 얼굴.

 

 

 

*

 

 

 

 네가 누군지 알고, 그날 밤 많이 울었다고. 조용히 떠나가는 너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고 나서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고. 

 

 

 

*

 

 

 

 신이시여, 청춘을 불쌍히 여기소서.

 

 

 

*

 

 

 

 장례식이랄 것도 없었다. 약속한 10분이 지나자 반란군의 수장을 안은 채 울부짖는 대대장을 끌어내러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병사들이 어쩔 줄을 모르자 더 높은 직급, 그리고 더 높은 직급의 병사들이 택운을 끌어냈다. 무려 장정 다섯이 달라붙어 이뤄낸 결과였다. 학연의 시체는 왕실 연합군과 반란군이 뒤섞여 쌓여있을 황무지에 버려졌다. 수천수만의 미래를 짊어졌던 사람치고는 꽤나 초라한 끝이었다.

 

 

 

 택운은 다시 기계처럼 하루하루를 살기 시작했다. 기계처럼 밥을 먹고, 훈련을 하고, 잠을 잤다. 당장이라도 목을 죄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죌 것도, 찌를 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됐다. 왜냐하면 차학연이 그걸 바랐으니까. 오래오래 살다 오기를 바랐으니까. 그것이, 차학연이 바랐던 ‘말로의 소망’이니까.

 

 

 

*

 

 

 

 신이시여, 청춘을 불쌍히 여기소서.

 

 

 

 

-Fin-   

 

 

 

 

 

 

누가 그를 하찮은 형이라 했는가. by. 익명
Salvatio by. D. 에르타
꽃잎놀이 by. 허브
사랑의 죽음 by. 춘몽
소년과 소년의 청춘 by. 청
Our Happy Ending by. 창문
힐링이 필요해 by. 징어
Nostalgia (노스텔지아) by. 이든
인어소년 by. 몽환의 오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by. 멜렛
One Step Closer to Blossom by. 디어